중·고등학교 수업시간, 선생님 몰래 서랍 속에 숨겨 보았던 만화책은 공부로 지친 마음에 활력소가 되곤 했다. 친구들과 돌려보다가 선생님에게 뺏긴 날이면 교무실에서 혼난 기억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책보다는 인터넷이나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화를 접하는 일이 늘었다. 학창시절 기억 속 만화책들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을까. 그 현 주소를 따라가 보자.

지난 1994년 창간돼 높은 인기를 끌었던 만화잡지 <영점프>가 올해 7월 15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이유는 물론 독자층 감소로 인한 수익성 저하다. 서울문화사 편집부 엄현종 기자는“인터넷과 게임 같은 대체 오락물들이 등장하면서 주 소비층이던 청소년들을 빼앗겼고, 그 결과 출판시장이 악화됐다”며 원인을 설명했다. 이는 똑같은 만화를 출판하는 것과 인터넷에 연재한 것을 비교할 때 후자 쪽 호응이 더 높은 현실과도 관련이 깊다.

또한 시공사의 격주간 순정 만화잡지 <비쥬(Bijou)> 역시 지난 9월부터 월간지로 개편 발행돼 만화잡지 시장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시공사 관계자는“만화 단행본에 있어서도 출판·판매 부수 모두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고 덧붙였다. 최근 만화계는 1만 부만 나가도 대박이라 할 정도로 단행본 판매가 극도로 저조한 상태다.

국내 출판만화 시장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잡지시장이 이렇듯 고사 위기에 처하자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기존 상업지 형태를 벗어난 새로운 잡지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달 2호가 발간된 <계간 만화>는 만화의 고급 예술화를 표방한다. 이 잡지에는 대중·언더그라운드 작가들의 작품과 전문비평가의 평론 등을 담았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김세준 과장은“작가가 창작의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한국 만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6월 만화가들이 시작한‘한국만화살리기운동’역시 침체된 만화시장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한국만화가협회 △우리만화연대 △젊은만화작가모임 △한국여성만화가협회 등의 4개 단체가 지난 1997년 이현세 씨의 <천국의 신화> 내용을 둘러싼 청소년보호법 파동 이후 6년 만에 다시 힘을 모은 것.

이들 단체는 인터넷사이트(www. kmana.co.kr)를 운영하며 7월에는‘한국만화·애니메이션 산업 발전 대토론회’에 참여해 제작지원과 대여권 문제 등에 대한 만화가들의 뜻을 밝혔다. 또 지난 8월에 열린‘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는‘한국만화살리기 엽서 전시회’로 참가했다. 한국만화가협회 이재영 사무국장은“오는 11월 3일 만화의 날을 맞이하여‘범한국만화살리기’선포식을 가질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이 날에는 4개 단체뿐 아니라 출판업계와 대여점 협회, 일반 독자들도 참여해 ‘한국만화 사보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 한다.

출판만화시장에 대한 만화가들의 대안 모색은 온라인 상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광복절에 김진, 김혜린 등 인기만화가 5명은‘We6(www .we6.co.kr)’의 온라인 창작공간을 오픈하면서 다른 만화 연재 사이트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들은 인터넷 연재 외에도 캐릭터 라이선싱, 오프라인 출판, 드라마·애니메이션화 등 다양한 관련 사업도 계획 중이다. (주)에이시스 커뮤니케이션스 관계자는“지금까지는 작가들이 미디어에 의존해 왔지만 이제는 작가가 미디어의 중심이 되고 있다”며 사이트 등장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처럼 만화계를 살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지만 국내 만화시장에 주어진 과제는 만만치 않다. 현재 만화유통시장의 80%이상인 도서대여점 및 만화대본소(만화가게 또는 만화방)에 집중된 전근대적 유통과정이 그 첫 번째. 이러한 기형적 시장형태는 저가·대형공급의 만화시장구조를 만들었고 독자들에게도 저가로 누릴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로서 만화를 인식하게 했다.

또한 90년대 이후 무분별하게 유입된 일본만화가 왜곡된 국내만화시장과 결합해 질적인 경쟁은 사라지고 출판사간 양적 경쟁만이 남은 것이다. 이에 대해 박인하(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는“메이저 출판사가 형성한 현재 시장구조를 벗어나 다양한 기획, 마케팅 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제적 출판만화 축제인‘부천만화축제(Bicof)’를 주관하는 부천만화정보센터의 신진규 씨는 올해 부천만화축제 중 강연에서 소개된 프랑스의 사례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그는“우리나라 역시 독립만화 출판사를 지원하는 일련의 사업을 체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며 생존이 어려운 국내 출판사를 지원하는 것이 기반이 돼야 함을 강조했다.

한편, 지난 5월 28일 문화관광부에서 발표한‘만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에 대한 만화관계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청소년보호법과 같은 규제를 완화하는 게 먼저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한국만화가협회 이재영 사무국장은“서점 내 만화책 배치나 만화방과 학교 간 거리, 만화 속 표현 등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인해 작가의 창작의욕을 저하시키고 전국의 서점으로 하여금 만화 유통을 포기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또 문화 콘텐츠 사업 자체에 있어 정부지원은 거름이 될 뿐 나머지는 창작자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만화는 시장 규모로만 따지면 문화시장에서 점유율이 8%에 불과하지만 TV·영화·게임·애니메이션·캐릭터 등 여타 문화산업의 원천소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분야다. 하지만 이런 대중예술로서 높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불황을 둘러싼 논란이 수년간 계속되어 온 실정이다. 박인하 교수는“현재 시장은 불황이지만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1990년대 이후 만화가 함축과 생략으로 무한한 의미 표현이 가능한 이미지 언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왔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자본과 결합한다면 진지한 대중들의 표현매체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일어나고 있는 만화계의 체계적인 움직임들을 고려했을 때, 점차적인 만화 시장 개선이 기대되고 있다. 여기에 일시적인 노력이 아닌, 만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수반돼야 함은 거듭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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