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듯이 일부 노인들은 지금도 삶의 활력을 찾기 위해, 못 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에는 여가활동이었지만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노인들을 만났다.

▲ (좌)민철기 단장과 (우)김호영 씨에게 'Fly Daddy'는 배움의 장소이자 못 다한 꿈을 이루는 모임이다.

"늙었기에 우리는 도전합니다!"

 “노년에 훨훨 날아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춘다는 의미에서 저희 합창단 이름이 ‘Fly Daddy’예요”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소속된 ‘Fly Daddy’는 남성 실버합창단이다. 2011년 탑골문화예술학교의 합창반으로 시작해 올해 서울노인복지센터의 신규 동아리로 승인됐다. 25명인 합창단원들의 평균연령은 70대를 훌쩍 넘었지만 합창에 대한 열정만큼은 20대 부럽지 않다.

 합창단을 소개하는 민철기(남·83) 단장은 인터뷰 내내 미소가 가득했다. “저번 달에는 압구정에서 콘서트홀을 빌려 공연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클래식뿐만 아니라 가곡을 부르기도 했죠.” 민철기 단장은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가 은퇴를 하고 가장 먼저 시작한 건 합창이었다. “2005년에는 다른 복지관의 혼성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러시아의 한인 마을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러다 남성 합창단이 더 편하고 새롭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2011년부터 Fly Daddy에 몸담고 있습니다.”

 은퇴 후 어렸을 적 꿈을 이루기 위해 합창단 활동을 하는 단원도 있었다. 총무를 맡고 있는 김호영(남·73) 씨는 2013년에 합창단에 가입했다. “서울로 오기 전에는 광주에서 37년 동안 교육공무원으로 근무했어요.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참 어려워요. 하지만 합창은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죠.” 김호영 씨의 아들은 고려대 교우로 당시 합창동아리에서 활동했던 적이 있다. “저희 사위도 합창단 활동을 하고 제 아들도 그렇고, 대대로 음악가 집안입니다”

 나이가 들어 힘드냐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민철기 단장은 어려운 악보를 외우는 것이 젊은 사람보단 못하겠지만 다른 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악보를 보고 익혀야 하지만 외우기 힘들 때가 있어 아쉽죠. 그래서 단원 모두 어려울수록 더 공부를 열심히 해요. 노인이기 때문에 특별히 힘든 점?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실버합창단이란 이름과 달리 Fly Daddy의 모습은 대학 동아리를 닮았다. 단원들끼리 야유회를 가기도 하고 합창 이후에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뒤풀이도 빼놓지 않는다. 민철기 단장은 단원들과의 관계도 합창단의 매력 중 하나라고 말했다. “공연도 어렵고 배우는 것도 어렵지만 늙어서 집에만 있으면 뭐하겠어요? 내일은 18명의 단원들과 함께 수원 화성에 놀러가요. 갈 생각을 하니 벌써 두근거립니다.”

 두 사람 모두 합창단 활동을 오래한 만큼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민철기 단장은 합창단 초기를 떠올리며 지휘자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초기에 지휘자 선생님이 발성, 악보 보는 법 등에 대해 일일이 개인교습을 해줬어요. 좋은 발성을 위해 단원들 배를 누르기도 했죠.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도 힘들다는 내색도 없었어요.”

 좋은 추억도, 좋은 사람도 많은 Fly Daddy이기에 합창단이 두 사람에게 가지는 의미 역시 남다르다. 민철기 단장은 합창을 위해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합창단이 없었다면 제 인생의 즐거움 40%는 없었을 겁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저에게 큰 의미예요.”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김호영 씨를 바라보는 주위의 반응도 달라졌다. “얼마 전에 광주에 내려갔는데 고향 친구들이 다 젊어졌다고 그러더라고요. 다 합창단 덕이죠.”

 두 노인은 앞으로 꿈을 묻는 질문에 힘을 주어 말했다. Fly Daddy가 더 큰 합창단이 되고 더 많은 공연을 하는 것. 김호영 씨는 “내년에는 30명으로 단원들을 늘리고 싶어요. 이번에 있었던 압구정 공연도 100석이 만석이 됐는데 힘을 얻어서 이제 큰 공연도 많이 해야죠. 꼭 그렇게 할 거고, 할 수 있을 겁니다”라며 소망을 내비쳤다.

 민철기 단장이 도전을 주저하는 노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적극 동참하라!” 김호영 씨 역시 노인들이 도전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삶을 소극적으로 살면 우울해지고 실제로 건강도 나빠져요. 합창을 비롯한 문화생활은 노인의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오청 시인은 나이가 들어도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라면 현장 답사 등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다.

"바람이 늦게 불었습니다"

 2009년 70세의 나이로 등단한 시인.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했던 소년은 70세에 시인의 꿈을 이뤘다. 바로 오청(남·78) 시인이다. 오청 시인은 중학교 때 학급 신문을 만들 정도로 글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부터 글이 좋았던 것 같아요. 김소월, 박목월의 작품을 보며 꿈을 키웠었죠. 하지만 대학교 때부터는 먹고 사는 일이 급급해 문학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어요.” 은퇴 후 오청 시인에게 시란 단순히 젊은 날의 꿈이 아니었다. 2006년부터 오청 시인은 본격적으로 시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성북종합복지관에서 다시 시를 배웠다. 그런 그에게 등단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언젠가 꼭 등단하리라고 다짐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늙은 나이에 시인에 도전하는 것이 왠지 창피하기도 했죠. 등단을 했을 때엔 늦게나마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습니다.”

 은퇴 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등단하기 1년 전에는 심장병 수술을 받아 도전을 멈출 뻔한 위기도 있었다. “14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어요. 수술 후 한 달 동안의 회복 기간이 있었지만 그때도 수업을 들었어요.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멈출 수 없었죠.” 특히 친구의 응원은 오청 시인이 그 기간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한 명 있어요. 제가 지쳐서 그만할까 싶을 때 끝까지 저를 이끌어줬죠.”

 오청 시인은 등단 후 현재까지 500편이 넘는 시를 창작했다. 세 번째 시집 발간을 앞두고 있는 그의 시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가족’이다. 첫 번째 시집에서는 어머니를, 두 번째 시집에서는 아버지를, 세 번째 시집은 아내를 주제로 엮었다. “가족의 사랑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지금도 항상 제 옆을 지켜주는 아내의 사랑은 항상 아름답습니다.”

 오청 시인의 첫 시집인 <어머니의 가슴>은 그의 그런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감사한 분은 돌아가신 어머니라고 말했다. “어머니 덕에 저는 목숨을 여러 차례 구했어요. 해방 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북한으로 향하는 배를 잘못 탔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를 찾아냈기에 다행히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죠.” 한국전쟁 때도 어머니 덕에 살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담벼락이 무너져 군인들이 저를 죽은 줄 알고 가마니에 덮어뒀었어요. 어머니가 제가 살아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병원에 데려갔죠. 제 첫 번째 시집은 그러한 어머니께 효도를 못한 후회스러운 마음을 담은 작품이에요.”

 항상 노력하는 오청 시인이지만 젊은 시인보다 좋은 시를 쓰지 못할까 걱정도 많다. “시는 늙지 않지만, 시인인 저는 늙어가고 있어요. 젊은 시인들과 차이가 안 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더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죠.” 오청 시인은 그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젊은 세대와 소통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직업전문학교에서 6개월 동안 인터넷, 컴퓨터 사용법을 배웠어요. 어쩔 수 없는 차이는 있겠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노력해보려고요. 제 시가 더 널리 읽히려면 젊은 세대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어요?”

 

글·사진|공명규 기자 zero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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