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 검은 우주에서

  고백하자면 영화관에 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극장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체질상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싫다거나, 뭐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 자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감미롭고 매혹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에, 영화관에 가는 것이 괴롭다. 방해 받는 것이 너무 싫기 때문이다. 영화가 별로라면 차라리 낫다. 문제는 정말 좋은 영화를 보고 있는데 방해를 받았을 때다. 막 마음이 덜컥 흔들리는 그 순간에, 옆 자리의 누군가가 킥킥 거리며 “저 표정 되게 웃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치자. 평소 같았더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나는 이걸 <프리즈너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당했다. 이 영화를 못 본 분이라면 집에 가서 확인하시라.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방해는 너무나도 치명적이다. 위대한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과 충격은 사라지고 황당함과 불쾌함만 남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절망뿐이라면 어떻게 남은 세월을 이어나갈 수 있겠는가? 아주 가끔 희망이 찾아들 때가 있다. 여러분, <그래비티>가 재개봉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우주비행사 라이언 스톤은 우연한 사고로 지구 궤도 밖을 떠도는 미아가 된다. 그녀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겪는 일들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주로 나서기 전 허무한 사고로 딸을 잃은 라이언은 삶에 대한 감흥 자체가 희박한 것 같다. 살고 싶다고 절실히 바란다 해도 그 상황에서는 탈출하기 어려울 텐데 그녀에겐 삶을 갈구할 이유가 없다. 재난은 가혹하고, 마음은 메말랐다. 그런데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라이언이 처한 재난은 그녀가 겪어 왔을 심리적인 고통과 무척 닮아 있다. 소리도 빛도 전달되지 않는 우주는 냉담하리만치 고요하고, 그 고요 속에는 중력 위에 살아가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위험이 가득하다. 딸을 잃은 슬픔을 내색조차 할 수 없는 라이언의 마음처럼 말이다.

바로 그 때, 기적이 벌어진다. 광대한 허무의 공간에 티끌보다 작은 존재인 한 사람이 비로소 살아남기로 마음먹는다. 이런 일을 어떻게 글로 적을 수 있을까. 산드라 블록이 놀라운 연기로 재현해 낸, 한 인간이 살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만큼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봤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떨 때의 중력은 일종의 족쇄지만, 누군가는 제 손으로 그 족쇄를 부수고 일어선다. 그 때 우리는 버티고 선 이 땅 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5년 전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나는 절망했다. 앞자리에 앉은 이는 영화 내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가 고개를 들 때마다 모자챙이 화면을 가렸다. 뒷자리에 앉은 인간은 영화 내내 의자를 찼다. 결정적으로, 옆 자리에 앉은 놈은, 그 자식은, 라이언이 지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 장면에서,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내 앞을 지나갔다. 한국이 총기를 규제하는 것이 정말 다행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절망으로 가득 찬 것만이 아니다. 여러분, <그래비티>가 재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못 본 분들 모두, 다시 한 번 칠흑 같은 우주 속의 산드라 블록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기적이고, 희망이에요.

 

이영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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