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를 맞이하는 3월은 ‘계획’의 계절이다. 새내기들은 오랜 달림 끝에 맞이한 휴식을 마치고 첫 대학생활을 준비한다. 정든내기들은 과목을 늘어놓고 한 학기를 결정할 시간표를 고안한다. 하지만 가끔 계획 없이, 발이 가는대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거창하지 않은 예술품과 사람이 자연스레 흘러 모인, 을지로 3가 ‘작은 물’에 몸을 담가보면 어떨까.

  꼬불꼬불 미로 같은 을지로 인쇄소 골목 안, 테이프조각을 이어붙인 간판이 세상에 ‘작은 물’의 존재를 빼꼼 알려준다. 2년 전 음악, 미술, 글을 사랑하는 5명의 친구가 함께 밥을 먹으려 마련한 이 공간은 이제 카페, 와인 바, 콘서트 장, 전시장, 작업실이 됐다. 각종 공연과 전시 포스터가 붙은 문 뒤에는 어쩌면 정신없는, 그러나 흐트러진 내 방처럼 편안한 공간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여러 곳에서 흘러온 사물들과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데 모여 ‘작은 물’을 이뤘다. 윤상훈(남·33) 사장은 이 공간에서 만난 사진가들이 선물한 사진으로 벽을 채우고, 옆 카페 사장이 선물한 식탁보와 조각가 친구가 만든 오브제로 테이블을 꾸몄다. 가게 안에는 최신 유행곡이 아닌, 윤 사장이 평소에 고른 음악들이 흐른다. 윤 사장은 거리에서 주운 샹들리에의 불이 훤히 켜지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쓸모없이 버려진 샹들리에도 가게를 훤히 밝힐 수 있더라고요.”

  윤상훈 사장은 음식을 메뉴에 올리기 전, 여러 재료를 배합해 흔치 않은 색의 맛을 만든다. “그림을 그리기 전 물감을 섞어 마음에 드는 색을 만드는 것과 같죠.” 라임, 자몽, 레몬의 맛이 섞인 작은 물의 에이드는 익숙하지 않은 상큼한 맛을 낸다. 와인 향기를 느끼며 새로움의 계절에 취하고 싶다면 와인과 ‘어묵치즈’를 함께 먹어보자. 짭짤한 어묵 사이에 살며시 녹아있는 치즈의 고소함이, 입안에 머금은 와인과 만나 나른한 저녁의 행복을 불러온다.

  “작은 물은 거창하지 않은 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골 물일 수도 도시 물일 수도 있죠. 작은 물은 그냥 ‘좋은 물’이에요.” 거창한 일을 해내는 게 부담스러울 때, 다이어리에 꽉 채워진 계획이 싫증날 때 이 공간을 찾아보면 어떨까.

 

글 | 최현슬 기자 purinl@

사진 | 조은비 기자 juli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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