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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
연구원·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지난 2월 12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가 때 아닌 ‘문화 검열’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은 ‘부록: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 중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합니다’라는 항목이다. <안내서> 발표 후 처음 며칠 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16일 한 언론에서 “ ‘외모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사실상의 방송 검열 아니냐는 반발이 커지고 있다”고 썼고, 이 기사를 한 국회의원이 SNS에 공유하면서 ‘문화 검열’논란이 확산되었다. 그 후 많은 언론이 이 내용을 보도했고, 여가부의 <안내서>에는 자연스럽게 ‘검열 프레임’이 더해졌다. 급기야 2월 18일, 여가부 장관은 “방송의 과도한 외모 지상주의가 불러오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이고 “규제나 통제라는 비판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해야 했다. 논란이 되는 부분도 수정·삭제하기로 했다. ‘가이드라인’을 ‘문화 검열’로 보는 것은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라는 기사들이 등장했지만, 성급하고 조급한 평가가 이미 확산된 이후였다.   

  이번의 <안내서> 논란은 우리 사회의 갈등, 표현방식, 소통부재 면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역사를 통틀어, 한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이 없었던 시대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거기에 성갈등이 부각되어 강력한 사회적 실존감을 갖게 되었다. 한국사회가 지역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성평등’의제 갈등이 해소되는데도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짐작케 한다.

  여가부의 <안내서>는 그러한 노력의 한 일환으로 생산된 것이다. 그동안 학계, 사회단체, 정부산하기관 등이 주관한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은 성별로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콘텐츠를 생산해왔다. 성과 무관하게 음악적 재능이 탁월한데도 외모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얼굴없는 가수’로 활동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는 어찌 보면 시청자들에게 시각적 즐거움도 함께 주기 위한 노력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출연자의 기회를 제한하고 시청자의 기호를 획일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방송계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외모선별기준이 우리 사회의 ‘외모’를 서열화하고, 취향과 미감을 획일화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2015년 기준, 20~24세 한국 여성의 평균 체구는 키 160.9cm, 몸무게 55.1kg이다. 동일 연령대의 남성은 174.2cm, 71.2kg이다. 이 기준과 비교하면 아이돌 스타의 신체 치수는 특별한 경우이다. ‘특별한 몸’을 요구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요청에 맞추느라 아이돌은 거식증에 걸리고, 일반인에게는 심각한 압력이 되는 것이다. 여가부의 <안내서>는 방송계에서 관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획일화된 외모기준을 다양화하자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보면 이번의 <안내서>는 단순히 양성을 평등하게 다루어줄 것을 요청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번의 일련의 사태는 <안내서>의 다소 유연하지 못한 표현, 유명 정치인의 쟁점화, 언론의 받아쓰기 등의 조건이 갖추어지면서 ‘일이 커진’면이 없지 않다. 논란이 된 <안내서>를 직접 읽고, 전체 맥락을 이해하면 그러한 평가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30조(양성평등)에는 방송이 지켜야할 내용이 이미 명시되어 있다. 이 규정은 오히려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 규정을 지키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가에 대한 예시를 포함한 것이 이번의 <안내서>이고 강제성은 없다. 다만 ‘해야 합니다’, ‘안됩니다’라는 표현이 오해를 부를 수는 있다. 또한 ‘음악방송 출연가수들은 모두 쌍둥이?’라는 표현은 자극적이기도 하다. 정치권은 이 내용들을 쟁점화했고, 언론은 그러한 평가를 확대 재생산하였다.

  방송가에서는 이러한 고려사항이 불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와 노력은 이미 규격화·획일화되어 있는 외모의 다양성을 확대하고, 사회갈등을 치유하고 나아가 (성)평등의 큰 숙제에도 보탬이 되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강압과 강제가 추동하는 사회였다면 이러한 논란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에, 이번의 논란은 일면 우리 사회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안내서>가 나올 수 밖에 없는 한국의 현재를 심도있게 고민해야 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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