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어 관련 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다. 예상 독자의 수준을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는 이 시험은 각 학문분과의 전문적인 연구내용을 읽기 지문에 담아내고 있다. 그래도 개중에 흥미로운 지문이 종종 발견되기 때문에 나름대로 배우는 맛이 있다. 나는 문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문계 지문에 눈이 가는데, 페미니즘과 관련된 지문이 굉장히 높은 비율로 출제된다는 것에 가끔씩 놀라곤 한다. 최근 한 클럽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 소식을 접하면서 새삼 이 지문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한 사회학 지문은 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직급이 올라갈수록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 연구는 진급 가능성 등의 지표를 언급하면서, 상위 직급의 여성보다 하위 직급의 여성이 더 큰 차별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상위 직급에서의 차별이 아니라 하위 직급에서부터 누적된 차별로 인해 여성 임원이 적어졌다는 것이다. 여성이 기업에서 겪는 어려움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페미니즘 비평의 성과를 소개하는 한 문학 지문은 비평가들이 모더니즘의 선구자로만 평가되어온 버지니아 울프를 새롭게 해석해낸 논리와 과정을 매끄럽게 설명하고, 젠더사의 사례를 제시하는 한 역사학 지문은 일본 면직물 산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기여했던 바를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수험생들은 이 지문들이 주장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거나 비판할 내용을 선지에서 찾는 훈련을 하고 있다.

  지문에 등장하는 연구들이 실재하는지 혹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사한 연구들이 수십 년 동안 각 학문분과에 켜켜이 쌓여왔으며, 중요한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에서 페미니즘을 천체물리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연구만 놓고 보면 여권 신장이나 성 평등에 도움이 안 되어 보이지만, 그것들이 논문을 벗어나 일상에 들어서 있는 광경을 보면 그것만으로도 작은 방파제가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기업에서 승진을 하거나 문학을 읽거나 노동환경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각자의 증거물로 제출할만한 신빙성 있는 자료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긴 힘들지만 한국 학계에도 다양한 연구들이 축적되어왔고 곧 빛을 볼 연구들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이 사람들 손에 쉽게 닿을 수 있으려면 연구의 질과 양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지난주에 다시 한 번 느낀 바와 같이, 머리가 굳어버릴 정도로 처참한 일들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는 여유롭게 자료를 뒤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사건에서 반복된 것을 포함해 이런저런 비상식적인 것들을 하나씩 밀어내고 밀어내면, 여기에도 어떤 구조물 같은 것을 세울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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