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5 13:32 (금)
지나쳐온 캠퍼스 공간, 생생한 역사의 산증인
지나쳐온 캠퍼스 공간, 생생한 역사의 산증인
  • 권병유 기자
  • 승인 2019.05.08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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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교 이후 114년 긴 세월 동안, 고려대 캠퍼스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왔을 터다. 캠퍼스가 간직한 역사는 기록물로 또는 선후배간의 입담으로 전해져 내려와 변해가는 공간의 가치를 더한다. 고려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서관 시계탑, 애기능, ()교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권병유 기자 uniform@

 

  혼란스러운 당시 사회는 몇 시였는지

서관 시계탑에서는 오전 9시와 정오에 시보가 흘러나온다. 조은비기자 juliett@
서관 시계탑에서는 오전 9시와 정오에 시보가 흘러나온다. 조은비기자 juliett@

 

  인문사회계 캠퍼스(인문캠)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 걸려있는 듯한 거대한 서관 시계탑 덕분이다. 문과대학 서관의 꼭대기 7층에 위치한 시계탑은 인문캠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다. 이 시계탑이 처음부터 서관에 있던 것은 아니다. 서관은 1955년 준공됐지만, 시계탑은 1961년 쌍용그룹초대회장 김성곤(보성전문학교 상과 30) 교우가 일본과 미국 등에서 주문 제작해 본교에 기증한 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키게 됐다.

  외관부터 눈에 띄는 시계탑은 예로부터 학생들의 관심을 끄는 존재였다. 직경 6(180cm)으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시계탑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한 우스갯소리는 고대생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하다. “서관 시계탑은 근로장학생이 자전거를 돌려 만든 전기로 돌아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전거 전기발생기 근로장학생 설은 시계탑을 향한 학생들의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다. 다행히 도서관 시계탑은 모터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시계탑에서는 매일 오전 9시에 교가, 정오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시보로 울려 퍼진다. 민주광장을 비롯한 교양관, 학생회관, 국제관, 본관 등 정오 서관 인근이라면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시계탑에서 울려 퍼지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동학농민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설이다. 1910년 의암 손병희가 보성전문학원을 인수한 이후부터 천도교의 영향을 받고,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정신을 기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서관 시계탑이 처음 설치됐던1961년에 본교에 입학한 서연호(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처음 시계탑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울리게 된 시점은 4·19 혁명의 직후였는데 당시 사회가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었다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묘한 분위기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학생들에게 착잡하고도 복잡한 마음을 줬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시계탑에 녹아든 동학의 정신은 캠퍼스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과대의 FM(Field Manuel)에서 나오는 구절인 녹두문대도 시계탑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비슷하게 동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경관이 지어지기 전에 문과대와 함께 서관을 사용했던 정경대의FM호안정대인데, 이도 시계탑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당시 정경대 학생회실이 서관 시계탑인근에 있었고, 덕분에 높은 곳에서 넓은 방면을 볼 수 있었기에 고려대의 눈이라는 의미로 만든 이름이호안(虎眼)’정대라는 설이다. 김원찬(문과대 불문18) 씨는 그저 크고, 아우라를 뿜는 멋진 시계탑으로 보였지만 역사를 알고 보니 문과대의 과거를 담고 있었다녹두문대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새기는 유일무이한 상징물인 것 같다고 견해를 밝혔다.

 

  묘소·태항아리까지 명당으로 주목받아온 애기능

 

애기능 동산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였던 '인명원'터였다. 이수빈기자 suvvin@
애기능 동산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였던 '인명원'터였다. 이수빈기자 suvvin@

 

  본교 이공계 캠퍼스(이공캠)의 애칭은 애기능 캠퍼스. 이공캠 한가운데에 야트막한 언덕인 애기능 동산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은 봄철엔 벚꽃과 철쭉이 흐드러져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명소가 되곤 한다. 애기능생활관, 애기능동아리연합회 등의 명칭에서 찾을 수 있듯이 이공캠을 대표하는 또 다른 고유명사로서 애기능은 이공캠과 떼려야 뗄 수없는 존재다.

  해당 장소에 애기능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먼저 원빈 홍씨와 인명원에 관한 이야기다. 본래 동산에는 정조의 후궁이었던 원빈 홍씨의 묘소인 인명원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요절한 원빈 홍씨 능으로 사용됐던 땅이기에, 사랑하는 빈의 능이라는 뜻으로 애기능이라는 애칭이 붙었다는 것이다.

  애기능과 인명원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1396년 애기능 근처에 영도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인근에 원빈 홍씨의 묘가 들어서자 절을 2마장(800m) 정도 개운산 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친숙히 접하고 있는 개운사다.

  이 외에, 아기의 태항아리가 담긴 석함이 이공캠 근처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애기능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교 박물관 유물대장에는 1969년 가을 본교에서 태항아리를 묻은 석함이 발견됐다고 적혀있다. 태항아리는 왕자나 공주의 태반과 탯줄을 보관하는 용기로서, 나라의 운명과 관련 있다고 믿었던 큰 의미가 있는 유물이다. 실제로는 태항아리가 교내에서 발견된 것은 아니고 고려대 담장 밖에서 발견됐다. 공사를 위해 땅을 파던 건설업체가 석함 두 개를 발견했고, 당시 윤세영 학예과장이 이 석함을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석함에 들어있던 태항아리는 국보 제 177호인 분청자인화문태호로 국내의 유일한 분청자기다. 구체적인 묘비석은 남아있지 않아 누구의 태항아리인진 명확하지 않지만 이 석함의 발견으로 아기의 능이라는 뜻인 애기능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김상덕 본교 박물관 학예부장은 왕실 자손의 태항아리, 왕실의 묘, 절 등과 관련된 곳이라며 애기능과 애기능 캠퍼스는 천혜의 명당자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제2공학관이 철거되고 애기능 주변 부지에 이공캠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 시설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애기능을 둘러싸는 거대 지하시설인 사이언스 π-파크(가칭)’는 인문캠의 중앙광장과 비슷한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고 있다. 자연 환경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기조 아래 랜드마크를 건축하는 데 있어 애기능이 중심이 되는 것을 보면 애기능의 큰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신희상(공과대 기계18) 씨는 처음엔 그냥 언덕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의미가 다르다학업에 지친 공대생이 캠퍼스에서 느낄 수 있는 회색 사이의 산뜻한 채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교우들의 힘으로 학교를 지키던구()교문과 호상

 

구교문은 1965년 당시 교우들의 성금으로 설립됐다. 사진제공│고려대학교 박물관
구교문은 1965년 당시 교우들의 성금으로 설립됐다. 사진제공│고려대학교 박물관

 

  현재 도로 건너편에서 바라볼 때 중앙광장이 보이는 한 가운데에 정문이 위치하고 있다. 본교 건축의 상징과도 같은 화강암 석조 양식을 띄고 있는 정문은 그 이미지가 마치 독립문과도 유사하다. 고려대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정문부터 중앙광장, 본관으로 이어지는 장면인 만큼 정문이 가지는 상징성은 상당하다.

  하지만 현 정문은 최초의 교문이 아니고, 원래 현 학생회관 위치에 조금 작은 규모의 구교문이 있었다. 이 최초의 교문은 교우들의 성금을 통해 건립됐다. 196555일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교우회에서 국내 최초의 석조 교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구교문을 본교에 기증한 것이다.

  이후 현재의 교문이 세워지게 되면서 구교문은 세종캠퍼스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세종캠의 새로운 교문의 완공이 20195월에 예정돼있다. 세종캠 시설팀은 새로운 교문이 완공되면 구교문은 새로운 교문과 동시에 세종캠의 출입구로 사용될 것이라며다양한 방면에서 캠퍼스로 오는 길을 두 개의 교문이 모두 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교문, 현재 서울캠퍼스 교문에는 모두 고려대학교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이 없다. 이웃 학교인 연세대에는 연세대학교라는 뚜렷한 이름이 적혀있고, 서울대는 국립서울대학교의 초성을 딴 ,,를 형상화해 정문을 만든 것과는 대조적이다. 현판이 없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는 굳이 본교의 이름을 적어놓지 않아도 누구나 이곳이 고려대학교인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에 대해 오탁번(사범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가 시를 쓰기도 했다. 시의 제목은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정문에는 문패가 없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시에는 입학원서를 들고 찾아오는 고등학생, 수천 명의 학생 모두 정문에 문패가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고려대 학생 노릇을 잘만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오탁번 명예교수가 본교 당국에 문패가 없는 이유를 물었더니 아 그래요? 참 그렇구먼요. 흐흐 정말 그런데요.”라는 허무한 답변을 들었다는 경험을 공유한다. 오탁번 시인은 모두들 저마다 가슴 속에 남모르게 금빛의 문패 하나씩 영원히 간직하고 있다는 듯이라는 답변으로 마무리한다. 현판이 없는 것이 본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더욱 높일 수 있도록 작용했다는 것이다.

  구교문과 함께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호상은 당시 재학생들이 직접 240여만 원의 성금을 모아 민족의 영원한 동맥이 되겠다는 의지를 담아 건립했다. 호상에는 조지훈 선생이 지은 호상비문이 적혀있다.

  김종훈(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호상비문에 나타나는 문구들을 보면 조지훈 시인이 민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그는 민족을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질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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