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내가 속했던 한 예능 프로그램인 <신서유기5, 6> 에선 출연자들을 약간 바보스럽게 묘사한다. 그들은 퀴즈를 할 때마다 무언가를 잘 모르고 어리숙한 느낌으로 포장한다. 그래서 일부는 방송이라서 그렇지 실제로는 아닐 거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 촬영본을 본 나는 그들이 진짜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심지어 한 출연자는 진심으로 당당하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신서유기의 촬영장에서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해?’라고 말하는 태도는 너무나 당당했다. 맞는 말이다. 지금 그에게 산 정상의 온도나 시사용어는 전혀 필요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뿐이다.

  프로그램 재미를 떠나서 나는 당시 그분을 멋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모습을 그렇게 당당하게 방송에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멋을 넘어 부럽기까지 하다. 나는 그동안 그 말을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모르겠다라는 말은 그 사람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찍어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군대에서 모르겠습니다대신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라는 교육을 받은 후, 나는 지금까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어려워한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어진다. 타인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왜곡된 표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는 체를 하거나 부정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이는 대표적인 꼰대의 특성으로 꼽힌다. ‘모른다라는 단어의 부정적 평가가 가져온 악영향이라고 본다. 꼰대 문화는 굉장히 복합적인 이유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잘 모르겠습니다.’가 좀 더 포용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조금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다고 모른다는 말을 무조건 권장한다는 것도 우습다. 무조건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이뻐 보일 리가 없다. ‘모른다는 말이 가진 무책임성 같은 부정적인 특성조차 긍정하고 싶진 않다. 청문회장에서 모른다라고 일관하는 모습들은 분명 잘못됐다. 그렇다고 해서 모른다는 말을 두려워하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답답하다.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다소 신기한 말이 있었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다가 정확히 본인이 모르는 부분만 짚어낸다. 모르는 부분이 너무나 명확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가장 가까운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 프로그램 제작을 20년 가까이 하고 계신 분임에도 모르는 게 있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인정하는 모습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명확한 모름. 모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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