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현장기획취재수업을 들으면서 취재원을 인터뷰할 일이 있었다. 고발적 성격이 짙을수록 취재원은 강한 언행을 이어나갔다. 화가 잔뜩 나서 요모조모 무엇이 잘못됐는지 내게 말해줬다. 나는 좋은 코멘트를 받았고, 신이 났다. 취재윤리에 따르면 인터뷰를 마치고서 반드시 취재원의 성명을 물어야 한다. “선생님 혹시 존함을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조심스레 물으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아니 그건 어렵지.” 그는 30분 남짓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한 말을 모두 철회했다. 혹여나 기사가 나가면 나를 고소한다고 했다.

 공적인 말하기는 어렵다. 이름을 밝히는 일은 더 어렵다. 혹시 자신의 반대세력이 자신을 찾아와서 불이익을 가하지 않을까, 현장에 찾아오지 않더라도 인터넷상에서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싶어 밤잠을 뒤척일 만한 일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일찍이 체득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뜻을 검열한다. ‘성명을 밝히라는 요구 앞에서 취재원이 수줍어지는 건 어쩌면 생존본능이다. 비슷한 상황은 학교 토론식 수업에서도 연출된다. 보이콧한 것처럼 입을 다문 학생들, 뻘쭘해진 교수님의 표정, 익숙하지 않은가.

 놀라운 사실은 악성 댓글을 쓰는 사람도 그 수줍은 무리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검열이 과한 탓에 소심하게까지 보이는 사람들이 돌변한다고 생각하면 기시감이 든다. 악성 댓글 작성자를 고소한 적이 있다는 연예인들은 방송에 나와 하나같이 말한다. “너무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고소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어요.”

 악성 댓글은 태초에 자유인의 사적 의견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 오른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댓글에 동조하는 이들은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에 댓글이 달리면서 화력이 거세진다. 댓글은 이제 베스트 댓글로 거듭난다. 베스트 댓글은 이 사회를 대표하는 여론인 양 기세등등하다. 누가 어떤 의도와 근거를 가지고 내뱉은 지도 모르는 말이 댓글 창에서 공적 성격을 띤다. 황색 저널리즘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한 언론사는 아직 베스트 댓글을 못 본 사람이 있을세라 댓글을 캡처해 퍼다 나른다.

 화력 좋은 악성 댓글을 본 사람들은 정신이 아득해진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걸까, 내가 미친 걸까 하는 의심의 굴레 속에 빠진다. 이른바 자유인이라면 연예인을 품평하고 손가락질해도 되는 것인가. 이제껏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지켜왔다고 생각했던 가치에 혼란이 생긴다. 내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믿지도 못할 지경이다. 과대표된 베스트 댓글에 묻히거나 부딪혀서, 소신 발언은 설 자리가 없다. 이렇게 사회 공공선에 균열이 난다. 악성 댓글의 파장은 한 사람에게만 닿는 것이 아니다. 여론을 호도하고, 사회를 왜곡한다. 그러니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인이여, 나는 당신의 이름과 성이 궁금하다.

 

김미루(미디어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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