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은 스무살] 스무 살의 봄
[교수님은 스무살] 스무 살의 봄
  • 고대신문
  • 승인 2020.04.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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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 말은 현재 시점에선 맞을지 몰라도 과거의 그때에는 맞지 않은 것 같다. 멀리 보이는 도시의 밤 풍경이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막상 가까이 가 보면 멀리서 보이지 않았던 추함도 공존하듯이 말이다. 지금은 스무 살의 그때를 아름답게 상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나를 둘러싼 실존적 조건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84년도의 안암캠퍼스는 지금과는 그 모습이 아주 달랐다. 현재의 중앙광장은 흙으로 덮인 대운동장이었고, 지금의 인촌 기념관이 있던 자리에 인촌 김성수 선생님의 묘소가 있었다. 그때는 지하철역도 없었고, 지금처럼 커피숍도 많지 않았다. 선후배와의 대화 자리에는 막걸리가 주종이었고, 하얀 거품(맥주)은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나 마셨다. 무엇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군부 독재 시대였기 때문에 캠퍼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들의 반 군부독재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4.18 기념식 하루 전날-고대생이 성격이 급해서인지- 학생들의 반 군부독재 민주화 시위와 전경의 최루탄 발사로 순식간에 캠퍼스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입생이었던 나는 너무나 무서워 학생회관 4층으로 올라가서 그곳의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두려움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 연출되었는데 여러 명의 고대생이 대운동장의 농구대를 청량리 파출소까지-당시에 시위방지를 막기 위해 임시로 세워진, 홍릉 방향 약 700m- 끌고 가서 싸우는 것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대학교 수강과목에 군사교육에 해당하는 교련과목이 필수로 지정되어 있어 교련복을 입고 목총을 잡고 자연계 캠퍼스 애기능에서 유격 훈련을 받을 줄도 몰랐다(사진).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이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을 통제하기 위해 남북분단 하의 냉전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술책이었다. 교련과목 학점을 받기 위해 문무대라는 군사학교에 1주일간 숙박을 하면서 군사교육을 받고 나와야 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학우들의 민주화 시위에도 동참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고 싶었던 철학 공부에도 그다지 재미를 못 붙이고 방황하는 일종의 주변인으로서 1학년을 보낸 것 같다. 애초 철학과를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대가 심했고, 계속 고집을 부릴 경우 등록금도 대주기 어렵다고 한 상태였다. 다행히 운 좋게 4년 장학생이 되어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지원을 받게 되어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학점이 3.0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도 당시의 현실참여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내가 정말로 철학이라는 고상하면서도 멋있는 학문을 잘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특히 교양 철학 개론 학점을 C0를 받고서는 상당히 낙담하였다. 그래서 학기 말 종강 파티 자리에서 학우들에게 학점 이야기를 하며 아무래도 다른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속내를 털어놨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학우와 그들의 입을 통해 들은 사실은 그 과목을 들었던 철학과 학생 중 3분의 1일이 F를 받았다는 것이다. 학우들은 내가 받은 C0는 좋은 학점이라고 말해주면서 부러워했다. 아마 상심한 나를 위로해 준 것이리라. 실상 나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고, 그들이 철학을 계속 공부했으면 나보다 더 훌륭한 철학 교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지금도 생각나는 철학과 교수님 두 분이 계신다. 한 분은 김충열 교수님이시다. 어느 날 오후 중국철학 강의 시간이었다. 그날도 역시나 강의실 밖에서 시위가 시작되었고, 잠시 후 지랄탄(최루탄의 일종으로 무정형 적으로 돌아다니면서 거친 소리를 냄)이 교내로 날아 들어와 터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로 선생님의 강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의자에 앉아 강의를 이어가시는 교수님이 야속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고 용기를 내서 질문했다. 밖에서 많은 제자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강의만 담담하게 하실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시면서 자네들은 여기 강의실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중 누가 천국에 있고, 누가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말씀하시면서 강의를 일찍 마치시고 나가셨다. 실상 강의를 하고 계셨지만, 교수님 역시 밖에서 최루탄에 콧물, 눈물을 흘리며 싸우는 제자들이 많이 걱정되어 좌불안석이셨던 것을 나는 몰랐다.

  다른 한 분은 지금의 내가 서양 고대철학을 공부하게 자극을 주시고 이끌어주신 권창은 교수님이시다. 선생님은 1987년 현민 유진오 박사 빈소를 고려대학교에 마련하는 것에 대해 다른 교수 4분과 함께 반대하셨다. 유진오 박사의 친일행적이 분명한데 민족의 대학 고려대학교에 빈소를 차릴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당시에 고대의 다수 교수가 5명의 반대 교수를 쫓아내려고 서명운동을 벌였고, 경찰의 감시 그리고 외부의 보수언론이 5인의 교수들에 대한 직, 간접적인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받으신 충격 탓인지 아니면 신은 착한 사람을 좋아해서인지 선생님께서 그 능력을 이 세상에서 다 펼치지 못하시고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다.

  지금의 신입생은 30년 후 자신들의 스무 살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나의 스무 살은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학생들의 외침과 울림으로 기억된다면 지금의 학생들에겐 코로나로 인한 정적이 가득한 캠퍼스와 강의실의 부재로 기억될까? 현상은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통된 것이 있지는 않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진달래꽃, 개나리꽃으로 가득 찬 캠퍼스는 아름답다. 스무 살의 젊음과 패기, 그 미소는 아름답다.

 

|  손병석 (문과대 교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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