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절반을 신문과 부대끼다 본가 여수에 내려간 날이었다. 언제 봐도 가슴이 탁 트이는 푸른 바다를 끼고 걷던 중, 몇 걸음 앞 길바닥에 겹겹이 놓인 하얀 국화가 눈에 띄었다. 꽃 더미 뒤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억울한 죽음 진상을 밝혀라!”, “더는 학생들을 죽이지 말라.” 지난달 현장 실습 도중 잠수를 하다 숨진 故 홍정운 군의 죽음을 추모하는 분노의 아우성이었다. 

  이 사건으로, 특성화고 현장실습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됐다. 일·학습병행법 도입으로 현장실습이 의무화되며 특성화고 학생들은 노동시장 진입 전 기업 중심의 실무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현장실습 산업체에서 발생하는 실습생 착취는 해결되지 못했기에 유사한 사고가 이어졌다. 

  지난 4월 평택항에선 청년 노동자 이선호 씨가 숨졌다. 개방형 컨테이너 벽체에 깔려 숨진 그의 이야기는 당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故 이선호씨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가 구성돼 노동현장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서기도 했다. 이어 중대재해법 시행령을 요구했고, 산업안전을 살피겠다는 약속도 얻어냈다. 

  일순간에 결집된 분노는 잠시나마 개선을 가져올 수 있다. 광장에 모여 촛불을 켜고, 정부와 기업을 질타하며 변화를 요구한다. ‘현장실습 폐지’, ‘계약관계서 검토’, ‘산재 예방교육 필수화’ 등 환경 개선을 위해 대책은 마련된다. 그러나 이 방안들이 고일 대로 고인 그들의 현장을 정말 바꿔 놓았을까. 관성적인 현실 앞에선 고개를 숙이지 않았는가.

  이내 현장의 상황을 상상해본다. 업무 지시 과정에서도 바삐 움직여야 하는 상급자는 미숙한 하급자의 개인적 상황을 따져 봐주지 않는다. “당신에게 위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신경 써서 경고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누구는 관리자 없는 현장에 처음 투입됐고, 안전모도 챙겨 받지 못했다. 수영을 못해도 선박 밑 따개비를 따러 잠수에 투입된다. 거스를 수 없이, 상급자가 지시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한다. ‘최하단 노동자’ 가 된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이다.

  현장은 미시적이다. 제도, 법칙, 규율은 멀리에 있어 닿지를 않는다. 누군가를 '책임'지겠다는 말은 거창하고 막연하기만 하다. 진짜 ‘책임’은 현장에서 함께 위험을 부담하려는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정운 씨, 수영할 줄 알아요?” 그에게 한 번이라도 물어봐 줬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얀 리본이 너울거리는 광경이 머릿속에 자꾸 맴돈다. 이 또한 제3 자의 낭만적인 상상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떠난 이들을 위해 오늘도 쉽게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정채린 미디어부장 ch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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