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는 일기장과도 같다. 떠오르는 생각을 마음 가는 대로 끄적이는 것이기도 하고, 지나가 버린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남몰래 마음을 표현한 글자는 오래도록 그곳에 남아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서울 곳곳에 무심히 새겨진 낙서 속 다양한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고대인의 낙서

  낙서는 학내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빛이 바래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있는 교양관 강의실의 낙서부터 학관 벽에 새로이 채워지는 낙서까지. 학생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교양관 6층 대강의실. 흐려진 낙서들 사이 또렷하게 적혀있는 다짐 한마디.
교양관 6층 대강의실. 흐려진 낙서들 사이 또렷하게 적혀있는 다짐 한마디.

 

본교 중앙동아리 ‘한국사회연구회(회장=남궁원)’ 학생회관 동아리방 주변에 코끼리와 보아뱀 낙서가 새겨져 있다.
본교 중앙동아리 ‘한국사회연구회(회장=남궁원)’ 학생회관 동아리방 주변에 코끼리와 보아뱀 낙서가 새겨져 있다.

 

오랜 시간 학생들의 낙서가 쌓여온 안암 ‘골목집’.
오랜 시간 학생들의 낙서가 쌓여온 안암 ‘골목집’.

 

본교 영화제작 동아리 ‘돌빛(회장=이기백)’의 1995년 잡기장에 적힌 낙서.
본교 영화제작 동아리 ‘돌빛(회장=이기백)’의 1995년 잡기장에 적힌 낙서.

 

  새하얀 벽을 물들이는 색색의 낙서, 벽화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데이그래피’는 2015년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적 기업이다. 데이그래피는 청년 작가들에게 벽화를 그리는 일자리를 제공한다. 

  박주성 데이그래피 팀장은 고객이 요청한 대로 결과물이 나올 때 뿌듯함을 느낀다. 고객이 벽화를 요청하면 박 팀장은 새롭게 문을 여는 카페나 시골 마을의 담벼락에 벽화를 채워나갔다. “마을 개발 사업으로 시골에 벽화를 그리러 갔을 때 가장 뿌듯했어요. 벽화를 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해 주시는 게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벽화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고객이 벽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거나, 작업한 곳이 파산하고 영업을 중단할 때 지우러 간 적이 있어요. 그럴 때면 마음이 아프죠.”

  벽화와 낙서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낙서는 자유롭게 그리는 거니 계획적인 그림인 벽화와는 거리가 멀죠. 또한 낙서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작업이기에 본인의 욕구만 충족하면 되는데 벽화는 고객의 요구대로 그리는 활동이잖아요. 결국 타인에 맞추는 거죠.” 

 

박주성 데이그래피 팀장은 을지로 인근 카페에서 벽화를 그린다.
박주성 데이그래피 팀장은 을지로 인근 카페에서 벽화를 그린다.

 

데이그래피 팀원이 벽화 작업을 하고 있다
데이그래피 팀원이 벽화 작업을 하고 있다.

 

‘브라질 카페’의 내벽은 컨셉에 맞게 형형색색의 페인트가 어우러져 있다.
‘브라질 카페’의 내벽은 컨셉에 맞게 형형색색의 페인트가 어우러져 있다.

 

낙서를 그리는 사람들

  도인호 <청춘의 낙서들>의 저자 도인호 씨는 대학생 시절 낙서를 모으는 게 취미였다. 시작은 집 앞에서 우연히 발견한 낙서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요상한 형’이라 적힌 낙서가 그를 반겼다. “그 낙서를 보면 위안을 받았어요. 낙서들이 결국엔 지워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 아쉬움을 달래려 낙서를 모아보기로 했죠.”

  그는 낙서가 익명성에 기반한 심심풀이라고 생각한다. “낙서라는 게 펜과 쓸 공간만 있으면 완성되는 거잖아요. 심심하면 그냥 적는 거죠. 익명성이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공개적이라서 낙서가 재밌는 것 같아요.” 낙서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인터넷 게시판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낙서로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모인 낙서는 그 장소를 나타내는 표상이 되죠. 재개발 구역의 낙서들이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자아내듯 말이에요.”

  낙서는 점차 잊혀 간다. “예전엔 다들 펜 한 자루 정도는 들고 다니면서 도서관이나 화장실에 낙서를 잔뜩 그려놨어요.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낙서들이 많이 없어졌죠. 요즘엔 관리가 잘 돼 낙서를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회현 시민아파트 입구에 적힌 안내 문구. ‘세탁물 널지마십시요.’
회현 시민아파트 입구에 적힌 안내 문구. ‘세탁물 널지마십시요.’

 

도인호 씨의 저서 '청춘의 낙서들'에 가득 실려있는 야구 팬의 낙서는 잠실야구장 출입구 부근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도인호 씨의 저서 '청춘의 낙서들'에 가득 실려있는 야구 팬의 낙서는 잠실야구장 출입구 부근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도인호 씨와 함께 낙서를 모으러 다닌 자동차 케빈의 서브 타이어.
도인호 씨와 함께 낙서를 모으러 다닌 자동차 케빈의 서브 타이어.

 

  알타임죠 2001년에 그래피티에 입문해 이제는 국제적인 그래피티 크루 <Stick Up Kids>의 멤버로 활약 중인 작가 알타임죠(ARTIME JOE)는 군 시절 접한 벽화 작업에 매료돼 전역 후 본격적으로 그래피티를 시작했다. “스프레이를 통해 나오는 색으로 빠르게 작업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관람객은 전통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작품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에요.”

  그래피티를 예술로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래피티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정해진 답을 원하는 건 오히려 이 문화 밖에 있는 사람들만인 것 같아요.”

  그에게 낙서는 그래피티만큼 특별하다. “낙서는 제 모든 작업의 시작점인 것 같아요. 점점 구체화하면서 재미를 느끼고 언젠가 그것을 벽에 옮기게 되니까요. 저에게 낙서는 미완성인 것, 그래피티는 완성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알타임죠(ARTIME JOE)의 작품 'My lovely friend and me'.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화풍이 인상적이다.
알타임죠(ARTIME JOE)의 작품 'My lovely friend and me'.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화풍이 인상적이다.

 

  코마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 코마(KOMA)는 친구와 함께 보던 잡지에서 감명을 받아 그래피티에 뛰어들었다. 그에게 그래피티란, 틀을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그려내는 원초적인 낙서 예술이다. 흰 벽 앞에서 베테랑 라이터와 초보 라이터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베테랑과 초보가 함께 벽에 낙서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끝내는 게 그래피티의 본질이죠.” 그들에게는 합판이나 도화지보다 빈 벽이 가장 좋은 캔버스다. 그가 그려내는 벽은 여러 장르의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아 평소 즐겨 듣는 노래 가사나 좋아하는 단어로 채워진다.

  “초창기의 그래피티는 주로 반달리즘, 낙서, 할렘가를 다뤘어요. 하지만 여전히 낙서와 아트의 경계가 없는 만큼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무분별한 행위는 지양돼야 해요. 그래도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지금의 그래피티가 예술로 자리잡은 게 아닐까요.” 그래피티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낙서한다. 

  길거리의 그래피티를 갤러리에 전시하면서도 스트릿 에너지를 잃지 않는 그는 ‘그래피티 팝아트’라는 장르를 만들어 그래피티의 독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마(KOMA)의 작품 'Pop Forest'. 두꺼운 선과 색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코마(KOMA)의 작품 'Pop Forest'. 두꺼운 선과 색의 조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우연히 발견한 일상 속 낙서

  때로는 우리가 직접 낙서를 그린다. 자물쇠에 문구를 적어 걸기도 하며 와인잔과 접시에 낙서를 그리기도 한다.

 

남산타워에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연인들이 남긴 자물쇠 낙서가 즐비하다.
남산타워에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연인들이 남긴 자물쇠 낙서가 즐비하다.

 

성수동 ‘서울앵무새’에서 조수빈(성균관대 독문22) 씨가 접시에 낙서를 그리는 체험을 하고 있다.
성수동 ‘서울앵무새’에서 조수빈(성균관대 독문22) 씨가 접시에 낙서를 그리는 체험을 하고 있다.

 

평소 이갈이에 시달리던 한 미국인은 온갖 벽면에 ‘이갈이’라고 적어 이갈이가 심각한 질병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평소 이갈이에 시달리던 한 미국인은 온갖 벽면에 ‘이갈이’라고 적어 이갈이가 심각한 질병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거리 위의 예술, 그래피티

  그래피티(Graffiti)란 스프레이, 락카, 페인트 등을 이용해 벽면에 그림이나 글자를 그리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슬럼가를 중심으로 발달한 그래피티는 사회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이다. 폐허, 담벼락 등에 허락 없이 그려지다 보니 반사회적인 행위나 범죄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 예술성은 끊임없이 주목받아 왔다. 서울 다양한 곳에서 수많은 예술가가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래피티를 새겨넣고 있다.

 

그래피티 작품들이 빽빽이 채워져 있는 압구정 토끼굴은 특별한 산책로로 자리 잡았다.
그래피티 작품들이 빽빽이 채워져 있는 압구정 토끼굴은 특별한 산책로로 자리 잡았다.

 

예술의 성지 이태원 거리 위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그래피티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예술의 성지 이태원 거리 위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그래피티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 ‘나나’의 낙서는 서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가 ‘나나’의 낙서는 서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을지로 셔터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을지로 골목 사이로 개성 넘치는 그래피티가 들어섰다.
‘ 을지로 셔터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을지로 골목 사이로 개성 넘치는 그래피티가 들어섰다.

 

신촌역 경의·중앙선 철길 아래의 토끼굴에는 그래피티 작품들이 그려져있다.
신촌역 경의·중앙선 철길 아래의 토끼굴에는 그래피티 작품들이 그려져있다.

 

하동근·진송비·한희안 기자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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