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 문과대 교수·서어서문학과
       이재학 문과대 교수·서어서문학과

 

  한국에서 라틴아메리카는 신흥시장의 하나로 분류되며, 이 지역에 대한 접근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대항해 시대가 펼쳐진 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을 비롯한 구대륙에 1차 산업자원을 수출하는 주요 공급처이자, 구대륙에서 생산된 공업생산품을 수입하는 소비시장의 역할을 해왔다. 라틴아메리카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로 연결되는 국제무역 질서 속에 완벽히 편입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령 아메리카, 즉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원주민들과 메스티소(mestizo, 혼혈인)는 사회·경제적 약자로서 고통받았다. 식민지에서 대농장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한 스페인계 백인 크리오요(criollo)들은 자치권 확대 및 유럽 국가들과의 직무역을 스페인 왕실에 끊임없이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이들의 불만은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및 스페인 왕실의 자유주의 헌법 승인 등과 맞물리며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다. 민병대를 조직하여 독립 전쟁을 이끈 크리오요 엘리트들은 독립을 쟁취한 이후 정치·경제·군사의 모든 분야를 독점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메스티소와 인디오들이 아닌 크리오요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은 스페인 식민 지배 시기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심화시켰다.

  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부는 북미가 아닌 멕시코, 페루 등의 중남미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심부였던 라틴아메리카는 주변부로 밀려났고, 주변부였던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중심부가 되었다.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농장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다른 국가들에 항구를 개방했다. 보호 관세를 철폐한 결과 유럽의 공산품들이 라틴아메리카 시장을 장악했고, 스페인 식민지 기간에 미약하나마 존재했던 경공업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반면, 대농장주들은 유럽에서 생산된 사치품들을 관세 없는 낮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들의 농장에서 생산된 상품들을 보다 낮은 가격에 유럽에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착된 농업 및 광업의 잉여 수출물에 대한 의존과 소비재의 수입이라는 악순환은 21세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한 1930년대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결합되면서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포퓰리즘 정치가 탄생했다. 독립은 하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유럽이나 미국에 종속되어있는 신식민주의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종속이론과 해방신학이 등장했다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과 1930년대의 유럽 국가들의 재무장, 뒤를 이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립 이후 처음으로 무역수지 흑자를 이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포퓰리즘 정치와 맞물리며 아르헨티나 등의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소득주도성장정책이 시행되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불평등의 대가는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안전망의 부재, 그리고 끊임없는 인적 자원 유출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수출주도 경제성장을 채택한 대한민국이 국제 무역 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아닌 대한민국이 신흥시장인 셈이다. 신흥시장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21세기 현재 멕시코와 브라질 등에 200여개 가까이 진출해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과 같은 대기업과 동반 진출 기업들이 라틴아메리카에 생산법인을 두고 있다. 특히 멕시코에는 미국의 반중정책으로 인한 니어쇼어링 효과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브라질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투자도 늘어나고 있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해방신학과 종속이론의 종주국에서 신흥시장 대한민국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이재학 문과대 교수·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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