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는 내게 공간적 고대와 시간적 고대로 다가온다. 87학번이라는 시간적 고대와 학교 캠퍼스라는 공간적 고대는 군사정권에 대한 투쟁과 타도의 함성이 결국 낭만과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내게 규정하는 크나큰 환경이었다. 1987년 고대의 민주화운동은 대운동장과 민주광장에서 시작됐다. 출정식이 진행됐고, 전경과 백골단은 정문을 방패와 지랄탄과 최루탄으로 봉쇄했다. 출정식은 한 폭의 시대정신을 담은 정치문화적인 공연장이었다. 노래얼의 노래와 그림마당의 대형 걸개그림과 진보문학회의 민중시가 시대를 울었고, 그 울음은 민주주의를 향한 고대정신의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됐다.

 민주광장과 대운동장은 출정식에 이어 지랄탄의 희뿌연 가스와 최루탄의 폭음 소리에 묻혔고, 어느 날은 백골단을 필두로 전경이 대운동장으로 난입하기도 했다. 전경에 밀려 대운동장에서 도망치며 오르던 4.18 기념탑 뒤의 언덕은 말 그대로 눈물과 분노의 언덕이었다. 짙은 안개로 내리덮은 최루가스 속에 신음하던 4.18 기념탑 속의 부조된 선배 군상들과 도망치며 오르던, 진달래꽃이 자지러지게 피어오른 그 언덕은 내게 고대의 4.18 정신이 군사정권에 의해 정면으로 도전받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분노와 민주주의에의 열망을 제기시장 앞에서, 동대문시장에서, 한국은행 앞에서 그리고 서울역 광장에서 쏟아냈다.

당시 집회가 끝나면 항상 마무리 평가와 뒤풀이가 있었다. 뒤풀이 장소는 각 단과대 돌건물 앞 잔디밭이거나 정문 앞 고모집, 마마집, 호질 아니면 제기시장 곱창집이나 닭발집이었다. 독재처럼 가슴을 옥죄어오던 최루가스를 막걸리로 씻어내며 우리들은 고모집 대구탕과 마마집 고갈비와 함께 김지하와 김남주와 박노해를 외웠고 목청껏 노래했다. 정문 앞 막걸리 집과 제기시장 소주집은 분명 시대를 고민하며 실천하던 공동체의 장이었다.  

독재타도와 사랑은 그 당시 같은 말이었다. 민주광장에서 대운동장에서 그리고 가투현장에서 우리는 처음 사랑을 만났다. 고모집 술내음 속에서 혹은 세느강변에 쏟아져 내린 별빛 속에서 밤늦도록 우리는 시대를 아파했고 이성에 대한 사랑과 이별을 공고히 했다. 고대의 공간과 시간은 이렇듯 나에게 역사와 사랑과 사회와 연대를 알게 해준 값진 교과서였다.

 이제 대운동장은 중앙광장으로 바뀌었고 해질녘 연분홍빛으로 물든 민주광장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내려다보며 친구들과 값싼 진로 포도주를 마시던 낭만의 교양관 시멘트 계단도 대리석으로 세련되게 바뀌었다. 세 곳을 모두 등정하면 도인이 되어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된다던 호상과 인촌묘소 그리고 다람쥐길 아래 ‘굴뚝’도 많이 변했고 제자리를 지키는 건 교정에서 저 홀로 시멘트물인 굴뚝 뿐이다. 세월은 가고 고대가 한 세기를 살았다.

내 기억 속의 고대공간과 고대시간은 현재와 다르다. 그러나 서관 시계탑의 새야새야 종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고 목련과 철쭉이 흐드러진 강당 옆 등교길을 오르던 나의 고대시절은 앞으로 강당이 허물어지고 다른 멋진 석탑이 들어서더라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대운동장과 인촌묘소와 서관 농구장은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의 고대 시간과 공간은 고스란히 내 존재의 섬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진시원 (부산대 교수·정치외교)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