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년이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한두레가 『밥 꽃수레』(남기성 작·연출)를 들고 대학로에 찾아 왔다. 1974년에 창립된 이후 중요 창작 마당극을 내놓은 한두레의 신작 공연이기에 그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기대는 현 한국 연극의 대체적인 경향이 안겨다 준 음울한 느낌에 대한 보상 심리이기도 했다. 지금 공연되는 연극들을 보고 있노라면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불씨로만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탄탄한 극작술과 한국의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번역극의 강세, 설화나 역사를 소재로 취하여 전통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형식으로 버무린 창작극의 경향, 아니면 한줌의 진실은 존재할지라도 소박한 휴머니즘의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거나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지만 관념적·퇴행적인 역사의식을 노출하는 창작극들. 일견 다양해 보이는 이런 양상들이 어떠한 방향성 속에 놓여 있는가를 눈치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지금 한국 연극이 현실과의 교감이 용이하지 않다는 표지이다. 이러하니, 전통양식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현실에 대한 진지한 발언을 통해 미래를 꿈꾸어 온 실천적인 연극, 곧 마당극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밥 꽃수레』는 1년 365일 불편한 왼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오른손으로 밥 수레를 이끌며 50여 년을 살아온 할머니, 신정례에 대한 이야기를 때론 경쾌하게 때론 아프게 풀어놓는다. 그녀의 삶에는 쓰라린 상처와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마치 불편한 왼손처럼 붙어 있다. 작은 오빠의 좌익 경력으로 시댁에서 쫓겨나고 큰 오빠를 따라 입산한 빨치산 경력, 그녀가 시댁에 두고 온 아들을 데리러 가던 큰 오빠의 죽음, 빨치산 경력을 지우기 위해 아들 경수가 딸린 상이군인 출신 남자와의 재혼, 그녀의 이력 때문에 진로가 막혀 좌절한 경수의 가출. 그녀의 왼손은 바로 이런 상처들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며, 그녀가 중한 병이 걸려 있음에도 왼손을 서둘러 수술하고 싶어했던 것은 성한 손으로 두 아들과 저승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서이다. 이렇게 보자면 힘겹게 살아온 그녀의 ‘꽃수레’는 불편한 왼손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했던 세월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치유는 신정례 할머니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지고, 그래서 이 연극은 아직도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앞으로도 풀기 쉽지 않은 역사와 개인을 위한 살풀이인 것이다.

삼면을 객석으로 한 돌출무대에서 연극을 역동적으로 이끌어가는 코러스들의 정제된 춤사위와 라이브로 연주되는 가야금·건반·해금 등의 조화는,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빚어진 역사의 상처를 한 인물의 상처로 녹여내고 신정례 할머니의 인생 역정에 대한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분명, 이 공연은 그에 걸었던 기대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처럼 역사와 개인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으로 연극의 형식을 조율하는 연극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 아, 그러나, 조금은 낯선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일까. 현실을 다루되 이제 그 현실은 인물의 내적 현실이며, 이것의 목표는 육체와 가슴에 새겨진 시간들 즉 맺힌 응어리의 해원(解寃)이다. 그리고 이 해원을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보다는 내적인 교감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한 것이 역력했다. 열린 판에서 오는 집단적 신명을 기대했지만 『밥 꽃수레』가 보여준 것은 닫힌 판에서 오는 개인적인 정서적 감흥이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기성 연극계가 처한 곤경과 마찬가지로 마당극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히 생각해야겠지만, 어쨌든 이 연극은 모처럼 행복한 조우를 할 수 있는 공연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신정례 할머니, 평안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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