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북유럽의 우울을 담고 있다. 이태리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해낼 수 없는 음울함이 그 색깔 속에 녹아있다. 피터 웨버 감독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예술 세계를 다룬 수작이다. 영화 속에서 화가는 하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 사랑이야말로 예술작품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동력이 되었노라고 작품은 강변한다. 그런데 영화의 한 켠에, 화가의 후원자인 한 귀족이 등장한다. 그 귀족은 화가의 그림을 사랑하고 그 작업에 후원하는데, 이 귀족이 화가의 하녀를 가까이하고 싶어 하면서 사건이 전개되는 장면이 있다.

부유한 귀족이 가난한 화가의 후견인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담고 있다. 부유층이 예술을 애호하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전통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귀족의 예술애호와 예술가 후원은 교양과 품격의 상징이었다. 이웃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예술가의 생계에 도움을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때 상당히 이름을 날렸던 명창 가운데 오수암이란 분이 있다. 이분은 특히 <흥보가>를 잘 불렀으며, 가운데서도 ‘제비노정기’는 당대의 일품으로 이름이 났다. 한번은 오수암 선생이 평양에 가서 소리를 하다가 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한 부자가 오수암 선생을 평양에 초청하여 <흥보가> 판을 벌린 것이다. 이 부자는 예술가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판을 벌리는 것으로 마을의 교양인 행세를 했었다. 판소리는 별로 모르지만, 자신의 집에서 소리판을 벌이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으로 예술 후원자 대열에 끼어들었다.

오수암의 <흥보가> 판이 무르익었다. 이 서민취향의 노래가 구경꾼들을 매혹시켜 빠져들게 만들었다. 흥보는 부러진 제비다리를 묶어서 하늘로 날려 보낸다. 제비는 따뜻한 남쪽 나라 강남으로 돌아가 겨울을 지낸 다음, 이듬해 봄에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제비노정기’는 강남에서 출발한 제비가 중국의 명승지를 거쳐서 압록강을 지나, 평양과 한양을 통과하여 남원 흥보 집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노래다. 제비가 날아가는 속도만큼이나 노랫말도 빠르게 연행되지만, 그 급한 행로의 끝에 남원 흥보집에 이르러서는 속도를 늦춰 너울거리면서 선회한다. 흥보가 반가워서 제비를 향하여 노래한다. “이리 오너라, 내 제비.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느냐? 이리 오너라, 내 제비.” <흥보가> 가운데 가장 격정적이면서 시원한 대목 ‘제비노정기’는 이 대목에서 마무리되면서 소리꾼은 큰 박수를 받게 된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졌다. 명창 오수암의 ‘제비노정기’가 “이리 오너라, 내 제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이 평양 갑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양반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더니 담뱃대를 휘두르면서 당대의 광대 오수암에게 달려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자신의 소리에 취해있던 오수암은 졸지에 갑부의 담뱃대에 머리를 맞아 피가 철철 흘렀다.

이 평양 갑부가 왜 이리 분기탱천하여 당대의 명창 오수암에게 분노를 터뜨렸을까?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이렇게 교양머리 없이 화를 낸 이유는 무엇인가? 상황은 잠시 후에 밝혀졌다.  평양 갑부 애첩 이름이 ‘제비’였다. 자신의 애첩을, 이 한갓 광대놈이 손짓하며, “이리 오너라 내 제비,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느냐?”고 추파를 던지고 농락하는 모양이, 잠시 판소리를 들으면서 낮잠을 즐기던 노인의 귓전에 들리던 순간, 목침을 날렸던 것이다. 이런 고얀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광대라고 대접하여 초대하고, 소리판 벌려 주고, 따뜻한 밥도 먹이고 든든히 해서 보내려 했는데······.

<진주귀걸이를 한 여인>에 나오는 부자 귀족도 나름대로 예술에 대한 후원자이다. 그런데 그 귀족도 화가에게 화를 냈다. 평양 갑부뿐 아니라 서양의 부자들도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간혹 예술가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요즘 교양 있는 부자들도 예술에 후원을 한다. 부자들은 예술가를 후원할 뿐 아니라 문화예술재단을 만들기도 한다. 부자들이 예술의 애호가가 되는 일과, 예술가의 후원자가 되는 것은 아름답고도 멋진 일이다. 다만, 부자들이 화를 내지 않게 예술가는 조심해야 한다. 예술가는 원래 눈치가 빠르지만, 정말 느닷없이 화를 내는 부자들을 당할 재간은 없으니까.

유영대(구비문학, 인문대 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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