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집착을 가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오페라의 유령’,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명작들에 대한 수식어는 항상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이었다. 관객들은 이러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정인을 갈망하지만,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삶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오페라 스토킹’은 라디오 MC인 혜은이 들려주는 오페라와 함께 진행된다. 소개되는 오페라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리골레토, 라트라비아타, 토스카, 호프만 이야기, 살로메 총 여섯 개로 이 모두가 비극적 사랑의 결말을 다루고 있으며, 전체적인 극의 흐름과 맥이 닿아 있다.

관객들은 한밤에 홀로 앉아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심정으로 배우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가 응시 대상이며, 그들은 공연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관객들이 던지는 시선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스토킹의 대상이 된다.

다섯 명의 배우는 타의 혹은 자아의 왜곡된 정신세계에 의해 각기 여러 모습의 실체와 허상을 연기한다. 다른 이를 스토킹하면서, 다른 이에게 스토킹 당하면서 한 사람의 모습은 프리즘으로 쪼개진 빛깔이 된다.

인물들 사이의 응시는 열정적이지만 무미건조하다. 진정으로 서로에게 하고픈 말은 그저 허공에 떠돌 뿐, 들어주는 이가 없다. 다만, 슬픈 아리아의 오페라만이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해주지만, 아무도 마음으로 들으려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R.Strauss의 [Salome]가 처절하게 흘러나올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소외된 사랑(?)의 비극을 깨닫게 된다.    
 
관객들은 작품을 보는 동시에, 무대 위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서 혹은 건너편에 앉아 자신과 다름없이 극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객들의 표정을 통해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정의하는 사랑의 기준은 명확한가. 내가, 내 연인이 바라는 것은 사랑인가, 소유인가.

배우들의 연기에 시시각각 반응하는 관객들의 표정들은 스스로의 관점이 올바르게 서 있는 지에 대한 또 하나의 기준이 돼 줄 것이다. 

스토킹은 다른 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닫아버린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기의 상상력을 헤집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쓸쓸한 작업은 어쩌면 사랑의 슬픔보다 더 아픈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제, ‘오페라의 유령’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다시 떠올려봐야 한다. 과연 사랑으로 용서되는 집착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명작의 ‘사랑’을 훼손할 의도는 없다. 다만, ‘사랑’의 이름으로 너무도 당연시되는 것들에 진정으로 핵심이 실려 있는지 경각심을 깨우쳐주고 싶을 뿐이다.

‘오페라 스토킹’은 우리가 동경하는 사랑이 변명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김혜정 (경제학과 01)

  ▲ 3월 10일 연극 <오페라 스토킹> 초대에 함께한 쿠키닷컴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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