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 sur oise). 아마 이곳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유럽 가이드북에서도 한 귀퉁이에 소개되는 파리의 교외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평생 이 작은 마을의 이름조차 들어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80년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 27살에 시작한 늦깎이 화가 고흐의 초기 작품들은 암스테르담 국립 고흐미술관(Van Gogh Museum, Amsterdam)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깔끔하고 정돈된 디자인으로도 유명한 고흐 미술관은 그의 생애별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파리 오르세미술관(Mus?e d'Orsay), 런던 내셔널갤러리(National Gallery)와 더불어 고흐를 이해하기 위해 꼭 들려야할 미술관이다. 

고흐의 초기 그림들은 주로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어두운 톤으로 그리고 있다. 고흐 미술관에 소장된 [감자먹는 사람들, The Potato-Eaters, 1885]은 이 시기 대표작이다. 하지만 1886년을 기점으로 고흐의 그림은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것은 파리로 그의 활동 무대를 옮긴 것과 관련이 깊다.

19세기 말, 파리는 예술가들이 몰려드는 번화한 유행의 중심지였다. 또한 관학파(아카데미파) 중심의 미술계 흐름이 인상파의 등장으로 인해 소용돌이치는 곳이기도 했다. 고흐는 인상파의 밝은 분위기와 일본 판화의 영향을 폭넓게 흡수하면서 자신의 그림 세계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그의 변화에는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이라는 친구의 도움도 컸다. 로트렉은 물랑루즈 등을 소재로 삼은 소묘나 원색적인 그림들로 유명한 19세기 인상파 화가이다. 

하지만 고흐에게 파리는 자신의 열정을 분출시키기 보다는 억압하고 눌러야하는 번잡한 대도시일 뿐이었고, 그는 마침내 1888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 아를에 정착했다. 아를, 앙베르, 마르세유 등 고흐가 거쳐 간 남프랑스의 도시들은 일 년 내내 강렬한 햇살이 작렬하는 도시이다. 이곳에서 고흐는 정렬적인 남프랑스의 모습들을 캔버스에 담아내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대표작들을 남겼다.

특히 아를에서 그린 [아를의 도개교, Langlois bridge at Arles, 1888], [밤의 테라스 Cafe Terrace at Night, 1888],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over the Rhone, 1888], [해바라기, Sunflower, 1888~9] 등은 작품 제목만 들어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이 가운데 해바라기는 10여점이나 그렸을 정도로 고흐가 특별히 아꼈던 소재였고, 작가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태양을 향한 해바라기의 열정은 그림을 향한 열정으로 한 평생을 살아간 고흐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린 시기로부터 120년이나 지난 지금이지만, 여전히 아를에는 고흐가 그린 도개교와 카페가 그대로 있고, 그가 다녔던 병원은 에스빠스 반 고흐[Espase van Gogh]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관광객들은 고흐가 화폭에 담았던 풍경들을 실제로 보는 것만으로도 열광했다. 아마도 이것이 인구 5만에 불과한 작은 도시 아를에 연간 2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이유일 것이다. 작은 도시에서조차 고흐의 과거 흔적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명소로 만드는 저력이 있었다.

▲ 고흐의 그림소재가 된 '밀밭'
▲ 오베르로 가는 길

 

 

 

 

 

 

하루 종일 작렬하는 태양, 남국의 정열적인 사람들, 이국적인 풍경들. 이 모든 것들은 고흐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열정을 제공해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1889년 고갱과 함께 작업하던 고흐는 발작을 일으켜 그와 다툰 끝에,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버렸다. 생 레미(St. Remy)에서 짧은 요양기간을 보낸 뒤, 고흐는 자신의 고향과 닮은 조용한 시골마을을 원했다.
  1890년 5월 파리 북쪽의 시골마을 오베르에 도착한 고흐는 시청 앞의 작은 여인숙 단칸방에 여정을 풀었다. 고흐가 살았던 단칸방에는 지금도 들어가 볼 수 있는데, 정말 작은 방에 작은 창문 하나, 작은 의자 하나, 작은 세면대 하나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학교 정문 앞의 아주 싼 단칸방보다도 더 열악해보였다.

다시 고흐에게 돌아가 보면, 그는 남프랑스에서 뜨거운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오베르에 정착했다. 그 뜨거운 열정은 폭발적인 작품 활동으로 발현되었다. 고흐가 오베르에서 보낸 일수는 약 70일이지만, 이 기간 동안 70여점의 페인팅과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오베르에서 그린 고흐의 그림들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 1890], [가쉐 박사의 초상, Portrait of Dr.Gachet, 1890], [오베르의 교회, L'elise d'Auvers-sur-Oise, 1890]처럼 하나같이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오베르에서 고흐는 그림에 미쳐있었고, 그 덕분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강렬한 색과 힘찬 붓터치, 샛노란 태양과 거친 밀밭. 고흐하면 떠오르는 위와 같은 이미지들은 그가 오베르에서 마지막 열정을 모두 소진하지 않았다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 오베르 교회
파리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오베르를 찾아간 나는 고흐가 살았던 여인숙에서 시작하여 마을 곳곳에 퍼져있는 고흐의 흔적을 따라 걸어보았다. 고흐의 정신과 의사였던 가쉐 박사의 집, 그림으로 더 유명한 오베르의 교회, 지금도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있는 밀밭,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흐와 동생 테오가 나란히 묻힌 무덤까지 가보았다. 나는 그의 무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그토록 열정적이었던 그가 자살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고흐는 한여름의 햇살이 쏟아지던 1890년 7월 28일 오후, 그가 자주 그리곤 했던 밀밭으로 나아가 자신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그는 피를 흘리는 채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이나 지난 7월 30일,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왜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든든한 후원자였던 친동생 테오가 독립하면서 생긴 불화 때문에? 신경쇠약? 정신병? 갑작스런 발작?

 

▲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무덤
나는 고흐의 무덤 앞에서 한참이나 차디찬 돌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해답을 얻었다. 그가 남국에서 가져온 뜨거운 열정이 폭발적인 작품 활동으로만 이어지지 않고, 그의 자살까지 부른 것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폭발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삼켜버린 것이었다. 

어느 것 하나에 몰두하는 열정. 어느 것 하나에 몰두해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삼켜버릴 정도의 열정. 고흐는 온 몸으로 열정이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한국사학과 04학번 임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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