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와 에로티즘

조르쥬 바타유
앞서 우리는 생각다운 생각으로서의 명상(暝想) 혹은 명상(溟想)에 쓰인 ‘명’자가 모두 ‘어두울 명’자임을 상기하며 어둠의 방으로서의 삶과 영화의 의의를 논의한 바 있다.
‘악의 꽃’으로서의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어둠이란, 세상의 아픔, 이웃의 고통, 남의 슬픔, 나의 시련이자 고뇌이며, 이러한 어둠을 함께 나누려는 작가로서의 희생적인 자세를 에로티즘 (érotisme)이라 부른다. 조르쥬 바타유(George Bataille)의 글에서도 예감하듯 에로티즘은 스스로 발가벗고, 나를 죽이고, 남을 위해 하나가 되려는 성직자와 예술가로서의 삶의 근본 자세를 일컫는다. 스스로 발가벗음은 나의 거짓과 위선과 기만을 벗어던지는 길이며, 나를 죽임은 나를 버리려는 노력 속에서 나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요, 남을 위해 하나가 됨은 모두를 위한 삶 즉 공동의 장소로서의 유토피아를 이루는 길이다.

‘utopia’의 ‘u’는 ‘non’ 혹은 ‘good’을 의미하는 접두사로 보통 장소를 의미하는 '토피아'와 결합하여 ‘이상적인 장소, 없는 곳’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예술 세계에서의 번역은 이와 달리, 서로를 위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동의 공간으로서, 현대인들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 일색인 익숙한 장소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장소 아닌 장소’로도 번역한다. 나 자신만을 위한 신앙이 무슨 소용 있으며, 나 자신만을 위한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아무 의미 없이 상업적 목적에서 발가벗음을 강요하는 포르노그라피는 자신들만을 위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겠지만, 에로티즘의 자세를 추구하는, 만인을 위한 시네마토그라프는 나의 고통을 토대로 공동체적 평화의 삶으로서의 유토피아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에로티즘의 가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를 위한 나’로부터 ‘남을 위한 나’로의 여정이야말로 진정한 인간다운 길이요, 스스로 발가벗고 내가 아닌 것을 위해 나를 버리는 이러한 에로티즘의 자세야말로 영화다운 영화로서의 시네마토그라프의 조건이다. 따라서 말로는 관객을 위하면서 정작 이해손득에 따른 특정 제작집단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에 진정한 영화로서의 시네마토그라프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는 없으리라.

이것은 시네마토그라프를 이루는 이미지 하나하나가 절대적ㆍ독자적 의미나 가치를 지니지 않기에, 이미지들간의 사이로서만 그 존재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들간의 관계를 떠나서는 개별 이미지 자체의 본래 의미마저 사라지고 만다. 마치 시어 하나하나를 사전적 의미로 해석할 때 시 감상이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시네마토그라프에서 모든 이미지들은 서로에게 열려 있으면서 서로를 위해 공존하기에 영화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人-間’이 서로에게 열려 있는 ‘사람-사이’이듯,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는 서로를 위해 열려 있는 ‘象-間’(이미지-사이)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이야기로서 이미지 사이의 의의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2) 남의 아픔에 대한 에로티즘적 배려


<원스 Once>의 나눔
함께함으로 이끄는 종교와 예술처럼, 어둠을 추구하는 시네마토그라프 역시 관계의 변화와 이에 따른 심정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는 글쓰기로서 에로티즘적 자세에 근거한다. <원스>에서 인물들간의 변화를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은 에로티즘에 근거하여 남의 아픔을 배려하고 있다. 아울러 남의 아픔에 대한 배려로 자신의 아픔을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아픔을 체험한 사람만이 그 고통 속에서도 진정한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난 속에 무시당하며 살지만 마음 따뜻한 사람들, 사랑의 아픈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하지만 서로의 슬픈 사랑에 위안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특별히 가진 것 없지만 남에게 베풀고 싶은 사람들…… 이들의 세상에 대한 따뜻한 배려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진실에 근거한 예술가들의 노력하는 자세라 하지 않았던가. 경제적, 학문적 혹은 사회적 신분 관점에서 자신보다 열악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을 폄하하는, 그야말로 천박한 사이비 예술가와 달리, 진정한 에로티즘에 근거한 가난하고 자유로운 진정한 예술가의 본연의 모습들을 존 르네의 <원스>에서 만날 수 있기에 행복하다.

슬픈 연가로 사랑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위대한 음악가의 선율처럼, 평화로운 그림으로 가난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화가의 손길처럼, 움직이는 사운드ㆍ이미지로서 영화 역시 인간의 고통을 평화롭게 감싸고 흐른다. 줄거리의 반전, 눈요기 액션 대신 인물간의 진솔한 대화와 관계 변화에 주목하면서 이미지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이어지는 숏들과 멜로디가 마치 성모 마리아의 사랑의 손이 그러하듯, 마치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손이 그러하듯, 우리 자신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배려 속에 흐르는 영화 속 멜로디—효과 음악이나 주제 음악이 아닌 실제 연주 상황의 음악으로서—어둠 속을 방황하는 익명의 가난한 뮤지션들의 모습 속에 용해되고, 이에 따라 관객은 안정된 마음으로 나와 남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직시하고 지금ㆍ여기의 나의 고통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된다. 아픈 마음은 개인만의 점유물이 아닌 관계의 변화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깨닫고 아픔의 돌파구 역시 인간관계의 변화를 통해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아픔은 모주 나의 아픔이라는 연민에 이르게 되기도 하는 데, 바로 이것이 예술의 자세이기도 하다.

건강하고 솔직한 마음가짐과 스스로 자신의 변화를 추구해가는 용기가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예술의 힘이다. 그러나 인간이 홀로 자신의 아픔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법, 누구에게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사이가 필요하다. 엄마, 연인, 친구, 자신 속의 또 다른 나 등등…… 이 사람들의 땅이라는 사람 사이에서 아마도 나와 닮았으면서 나와 구분 되는 친구로서의 일기야 말로 가장 진실한 영화 속 연인 같은 사이의 존재 아닌가.

영화는 사실 고백의 일기와 다를 바 없다. 상대의 거짓말까지 포용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침몰을 감내하면서, 떠나간 연인의 위선을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우연히 만난 낯선 상대의 배려에 감동 받으면서, 나의 아픔은 햇살에 하얀 눈 녹아내리듯 가슴 속으로부터 흘러내린다. 영화가 끝나고 다시 만나게 되는 나는 이제 그만큼 더욱 솔직해진 나, 예전의 내가 아닌 나, 더욱 건강한 나이다. 색안경을 벗고 마음의 창문을 열고 일기장의 여백을 새롭게 채워 보자. <원스>의 익명의 이주노동자 여주인공은 주인공을 위해 자신의 일기로서의 노랫말을 만들어주면서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아닌 나’로서의 고백을 통해 일기장의 거울 속에 비친 진정한 나를 정면으로 들여다보자. 그 흔한 휴대폰 하나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가난한 익명 주인공 역시 익명의 여주인공에게 고가의 피아노를 선물하는 또 다른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기뻐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를 연루시키는 아름다움의 성격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를 열어 보이는 것은 우리 주위의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지니는 아픔이다.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아픔에 대한 배려로부터 출발하는 예술은 이기적 무관심과 벌이는 침묵의 싸움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이러한 윤리적 자세에서 비롯한다. 에로티즘의 희생적 아름다움이 세상의 아픔을 굽어 살핀다.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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