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사랑한단 말인가, 비범한 이방인이여?—구름을 사랑하노라… 흘러가는 구름을…저기… 저곳에… 경이로운 구름을!보들레르,「이방인」1) 이방인의 눈으로서 카메라-눈 ‘나’를 버리는 에로티즘의 눈길로 어둠 속의 움직임을
이것 있어 저것 있으며, 이것 생기니 저것 생기네. 이것 없이 저것 없으며, 이것 사라지니 저것 사라지네.1. 영화의 사운드ㆍ이미지들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는 철학자들의 명상처럼 빛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어둠을 생각하고, 종교와 예술의 공통 토대로서 에로티즘을 생각한다. 영화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로서, 새로운 방식의 느끼기로서 그 정서적 눈물과 웃음을 통해
1) 영화와 에로티즘앞서 우리는 생각다운 생각으로서의 명상(暝想) 혹은 명상(溟想)에 쓰인 ‘명’자가 모두 ‘어두울 명’자임을 상기하며 어둠의 방으로서의 삶과 영화의 의의를 논의한 바 있다.‘악의 꽃’으로서의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어둠이란, 세상의 아픔, 이웃의 고통, 남
은밀하게 치루는 기본 의식에 따라,구원받을 수도 없는 명상(冥想) 속으로 자신을 가두는 밤.-생텍쥐페리, 앞서 우리는 영화에 관해 몇 가지 우문을 던지고 이렇게 답한 바 있다. ‘영화는 종합예술인가?’,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는 빛의 예술인가?’ ― 영화는 종
영화는 기술문명의 산물이다 문학과 예술에서처럼 문명은 어둠의 체험을 전제로 한다. 다만 어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던지는 이원론적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바라본 문명은, 어둠의 체험을 통해 그 공간을 더욱더 넓혀 가는 문학과 예술과는 달리 어둠을 부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나머지 빛과 어둠을 대립 구도로만 설정하고 있다. 생명의 빛, 축복의 빛, 구원의 빛, 밝힘
모델. 모델들은 촬영 중에는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으나 화면상에서는 깊이 있고 진실되게 보인다. 궁극적으로 가장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가장 평범하고 또 가장 빛나지 않는 부분들이다.로베르 브레송,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는 종합예술인가?’라는 물음이 고정관념에 갇힌 영화에
이제 종합예술이라는 표현의 모호함에 관한 무척 간략하고 피상적인,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하나의 영화적 논의의 핵심에 이른 듯하다. 건축이 종합예술인가? 건축물 공간의 한 부분을 회화와 조각이 차지하고 있다고 건축을 종합예술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건축의 의미규정에 따라 물론 그러한 정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우디를 종합예술가라 부를 수
지금까지 영화와 문학은 생산적인 관점에서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수행해온 듯하지만 실상 이 두 예술 사이의 차이는 대단한 것이다. 영화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학으로부터만 점점 멀어질 뿐 아니라 여타의 예술 장르와도 멀어질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영화는 점차 독자적 예술 장르가 될 것이다. — (1985), 타르콥스키시는 말로
영화가 지니는 반쪽만의 특성으로 영화를 대변하는 이들의 논리에 적응된 우리는 그들의 선전 선동 문구에 매료된 듯 이제까지의 영화인의 희생적인 노력을 간과해버리고 진정한 영화인의 말보다는 영화를 개인적인 삶의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언설에 귀 기울인다. 영화 속에는 영화가 드물고, 영화 기사에는 작품의 정신이 사라지고, 진정한 영화인은 영
영화는 예술인가?예술은 진실을 조건으로 하는 함께함으로의 길이다.예술은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사이의 대화이며,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원치 않는 나’ 사이의 대화이며, ‘나를 위한 나’와 ‘만인을 위한 나&rsq
나는 있는가. 나를 느끼는 나는 있는가. 그 누구로부터,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있음을 느끼는 나를 발견해본 적이 있던가. 사실 몸뚱이와 정신만 있을 뿐 나는 없는데. 나를 바라보는 나만 있는데. 나는 ‘나’라고 해야 옳지만 그런 짓거리로 언어의 세계를 치장하지는 말자. 나가 ‘나’를 보면 그만이니까.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