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은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주권을 되찾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지만, 국권을 잃었던 조국에 태어나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했던 소녀들은 아직도 고통 받고 있다. 사전적 의미의 일본군 위안부는 ‘침략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본군에 성노예로 강제 동원되어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여·84세) 할머니의 증언에 묻어나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녀에 대한 폭력이고 치유될 수 없는 상처였다.

“17살이었어. 시집도 안간 사람이 얼마나 무섭겠어. 지옥굴보다 더 무섭지. 사람 잡는 도살장이야. 그 자리서 죽고 말지 어떻게 사냐 말이야.”

14일이면 1000회를 맞는 수요 시위. 오랜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위안부 문제가 지나온 시간을 짚어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발생
식민지 조선의 경제 상황은 매우 열악했고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에는 부모나 남편 등 친족에 의한 여성 매매가 성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도중 군인들의 성병이 확산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청일전쟁 때부터 민간의 군 위안소는 있었지만 1932년 일본 해군이 상해에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37년부터 일본군은 체계적으로 위안소 설치에 관여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당했는지 그 수를 파악할 수 없다. 적게는 약 2만 명에서 많게는 약 41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피해 신고자는 234명이며 이중 생존자는 64명이다.

민간에서 시작한 위안부 문제 관심
1988년 7월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 의해 ‘정신대연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오랜 세월 잊혀져왔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촉발됐다. 1990년 11월에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 결과 이듬해 故김학순 할머니가 한국에서는 최초로 피해자임을 증언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고발을 계기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시작됐으며 1992년 1월 8일, 제1회 수요시위가 열렸다. 이어 불교단체의 지원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이 개설됐다. 이후 ‘한국정신대연구소’와 ‘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시민모임’ 등 많은 민간단체가 생겨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나눔의 집 로고

일본 정부의 태도
1990년 이전까지 일본 정부는 위안부가 민간업자에 의해 운영돼 정부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1992년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위안부 제도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공문서 자료가 공개됐다. 이듬해 일본 수상이 방한해 사죄하고 조사를 약속했다. 이를 ‘고노 담화’라고 한다. 고노 담화를 통해 1995년부터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1997년 중학교의 모든 교과서에 위안부 사실이 기재됐다. 그러나 2006년에는 모든 중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이 사라지는 등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1995년 7월에는 일본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위로 사업 등을 실시하려는 목적으로 ‘국민기금’을 설립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국가차원의 정식 사과와 배상이 아닌 ‘국민기금’을 거부하고 비판했다. 2007년 3월말 국민기금은 해산했다.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계기로 위안부 피해 사실은 인정하지만 1965년 맺은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오고 있다.

한국 정부의 지원과 해결 노력
1992년 당시 한국 정부는 외무부를 중심으로 정신대문제 실무대책반을 구성해 피해신고와 증언 접수를 위해 노력했다. 1993년부터는 ‘일제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에 대한 조사는 1992년 이후 지속되지 못하다가 2004년 ‘일제강점 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조사를 다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국외에 사는 한국 출신의 피해자에까지 지원 사업의 대상을 확대했고 이후 2008년에는 일본에 공식사과와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국회의원의 전원일치로 채택되기도 했다.

올해 8월 정부 위헌 판결
헌법재판소는 2006년 7월 당시 위안부 생존피해자 109명이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낸 헌법소원심판청구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1965년 6월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은 부작위로 인해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을 근거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왔다. 이에 대해 그동안 한국 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배상청구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헌법재판소는 한일협정에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포함되는지를 놓고 해석 차이가 존재하므로 협정절차에 따른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며 정부의 즉각적인 대응 필요성을 지적했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빼앗긴 순정'

오는 12월 14일에는 수요시위가 1000회를 맞는다. 수요시위를 주최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1000회 수요시위를 기념해 세계 70개국 여성단체가 해당 지역의 도심, 학교, 일본대사관 앞에서 동시에 시위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평화비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평화비는 10대 소녀의 모습을 한 동상이지만 그 그림자는 할머니의 형상으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