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종합예술이라는 표현의 모호함에 관한 무척 간략하고 피상적인, 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하나의 영화적 논의의 핵심에 이른 듯하다. 건축이 종합예술인가? 건축물 공간의 한 부분을 회화와 조각이 차지하고 있다고 건축을 종합예술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건축의 의미규정에 따라 물론 그러한 정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우디를 종합예술가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건축가로서의 예술가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건축가이기 때문에 예술가인 것이다. 오페라는 종합예술인가? 연극적 무대, 의상, 조명, 디지털 장비, 스크린 자막, 이 모두를 고려해도 오페라는 음악이다. 상업적 시각에서 현란함을 내세우기 위해 남용되어온 종합예술이라는 명칭 이면에는 사실 예술로서의 개별 장르가 지니는 독자성을 애써 외면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실제로 많은 영화계 인사들이 한 결 같이 영화를 종합예술로 지칭하고 있지만, 영화다운 영화를 인류에게 선물한 영화인들 가운데 영화를 종합예술이라 규정한 사람은 없다.

뤼미에르 형제와 시네마토그라프
루이 델뤽 이후 기존 예술 장르의 틀을 벗어나 영화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려는 감독들의 노력 덕분에 카누도가 예언한 ‘제7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영화는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새롭게 닦아왔다. 이 길이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헐리웃은 자본의 길을 가겠지만. 뤼미에르 형제들도 오늘날의 영화를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튼 문제는 오늘날 연극이나 소설 같은 기존 예술의 요소들 즉 서사성이나 극적 효과에 의지하는 작품이 우리 영화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로베르 브레송과 장 콕토에 의하면, 영화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존 예술 형식 즉 시와 음악, 회화와 연극에서 유래하는 형식적 요소들의 단순한 종합에 의거하는 영화로서 <시네마>로서의 영화이며, 다른 하나는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영화적인 영화, 영화다운 영화인 <시네마토그라프>로서의 영화이다. 영화를 종합예술로 지칭하는 것은 영화만의 장르적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조금 서운하다 싶으면 그저 이렇게 말해보자. 영화는 생동감을 지닌 보편성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이 말조차 벌서 우리의 의식을 불안하게 한다. 아직도 영화의 뮤즈를 발견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영화 작품들의 예술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상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라 시오타 역에 들어오는 기차>는 극장에서 대중을 상대로 공개된 세계 최초의 상업 영화로 평가되며, 영화 역사의 태동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가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뤼미에르 형제가 개발한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로 찍은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는 진정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예고한 데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기원으로서 뤼미에르 형제의 천재성을 알리는 <라 시오타 역에 들어오는 기차>(1985)의 달려오는 기차 이미지에 놀란 관객들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바로 이 순간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가시적 세계를 재생해내는 새로운 테크닉의 탄생을 넘어 새로운 미학의 원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시간을 직접적으로 포착하고 재생하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순간, 움직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로 순간을 포착하는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그 어느 장르도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그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 내에 묘사하여 재생해 낼 수 없었다. 순간포착의 글쓰기로서의 영화는 자동글쓰기를 시도한 초현실주의자들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려한 인상파 화가들의 염원을 이루어 이루는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더구나 영화의 역사는 극히 미천하다. 하지만 각 장르마다 예술의 탈을 뒤집어 쓴 사이비 예술이 그 현란한 말과 얼굴로 20세기를 치장해오는 동안, 드레이어, 강스, 뷔뉘엘, 르누아르, 채플린, 에이젠슈쩨인, 오즈 같은 감독들의 숭고한 노력은 예술의 근원을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 훌륭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점에서 영화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장르보다 진솔하게 하나의 장르로서의 모범을 보이면서 20세기 예술의 주류를 선도해왔다. 이점에서만큼은 영화를 예술로 자리매김 하는 데 반대할 자 아무도 없다. 여기에 영화의 예술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물음을 던졌다. 영화가 예술인가? ‘영화가 종합예술인가? 이 물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모든 물음이 에피스테메를 상정하듯 이 물음 역시 우리를 영화적 에피스테메로 인도할 때만 가치를 지닌다. 오호통재라! 우리는 너무도 많은 불필요한 영화 담론들 사이에 끼어 있다. 영화와 포스트모더니즘, 영화기호학, 영화와……, 영화와…… 하지만 영화 본색을 무색케 하는 이러한 거창한 담론 이전에 간단하기만 한 또 하나의 물음을 통해 영화가 비추는 道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고자 한다. 영화는 과연 ‘빛의 예술’인가? 모두가 타성적 빛만을 추구하는 오늘날, 아무도 던지지 않는 이 물음 역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하지만 질서는 언제나 혼란 속에 있는 법이다. 빛 또한 어둠 속에만 있는 법이니 혹시 영화가 ‘어둠의 예술’일 수도 있는지 간절히 묻고 싶을 따름이다.

송태효(본교 레토릭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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