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역사성 담아 문화적 수요에 부응해야
지역의 역사성 담아 문화적 수요에 부응해야
  • 김태형 기자
  • 승인 2019.11.24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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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시설로 거듭난 산업유산

 본교 SK미래관이 최근 학생들에게 완공된 모습을 드러낸 가운데, 미래관 공사와 병행됐던 대강당의 리모델링도 독특한 모습으로 주목을 받았다. 과거 대형 강연이 이뤄지거나 응원단의 연습공간으로 활용되는 등 학생들의 추억으로 남아있던 대강당을 철거하지 않고, 고딕 양식의 외관을 유치한 채 내부의 모습만을 세련되게 바꾼 것이다.

 기존의 낙후된 공간을 없애지 않고, 옛 모습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사례는 본교만의 일이 아니다. 특히 과거 산업화를 이끌던 제조업이 쇠퇴하며 늘어난 폐공장, 운영이 멈춘 유휴산업시설 등을 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한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소가 됐다.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한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명소가 됐다.

유럽에서 시작된 공업시설 재활용

 공업시설의 재활용에 대한 고민은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산업혁명이 처음 시작된 유럽에선 석탄, 철광석 등 원료 산지를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이 발달했다. 하지만 석탄에서 석유로 주요 에너지원이 바뀌고 수송용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원료의 수출·수입이 유리한 바다나 강 근처로 공업입지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독일의 루르 공업지역, 영국 랭커셔 지역 등 초기 산업혁명을 이끌던 전통 공업지대는 작동을 멈추고 방치되기 시작했다.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폐허가 된 산업시설은 한동안 흉물처럼 방치됐다. 철거 후 다른 건물을 신축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유럽인들은 작동이 멈춘 공장들을 산업유산으로 인식하고 재활용을 모색하려 했다. 김홍기(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오랫동안 산업을 일군 공장은 지역 주민들에게는 삶의 애환이 담긴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이를 지역의 역사와 집단적 기억이 남아있는 산업기술문화재로 인식하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문화공간으로의 탈바꿈을 시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노력은 독일의 뒤스부르크 환경공원(구 루르 공업지역)과 영국의 테이트모던 미술관(구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처럼 유명한 관광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석현(중앙대 실내환경디자인전공) 교수는 유럽의 경우 근대 건축자산의 활용과 보존이 일상화돼 기존 건축물의 외관은 보존하고 내부를 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키는 사례가 익숙하다오래된 발전소를 세련된 현대미술관으로 재생시킨 테이트모던은 지역의 문화적 삶을 풍요롭게 함과 동시에 런던을 세계적인 문화기지로 각인시키며 관광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한 사례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공업시설의 재활용은 곧 도시재생의 세계적 트렌드가 됐다. 특히 유휴공업시설의 물리적 특성은 활용의 전환에 용이했다. 김현주(서울연구원 부연구위원) 박사는 대체로 폐공장이나 유휴산업시설들은 지역 내 주요 거점에 자리한 데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따라 과감한 건축적 시도가 가능할 만큼 큰 공간을 자랑한다지역경제와 도시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상징적 의미도 갖추고 있어, 시설의 가치를 공공에 환원할 수 있는 문화시설로의 활용이 적극적으로 고려된다고 설명했다. 강동진(경성대 도시공학전공) 교수는 단일한 목적을 넘어 공간의 가변성이 요구되는 시대 흐름에서, 복합적 활용이 용이한 문화시설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문래동에 위치한 카페 올드문래는 과거 철공소였던 모습을 보존한 독특한 분위기로 인기를 얻고있다.
문래동에 위치한 카페 '올드문래'는 과거 철공소였던 모습을 보존한 독특한 분위기로 인기를 얻고있다.

한국은 늦지만, 다양한 사례 있어

 우리나라는 유럽보다 산업화 시기가 늦었던 만큼 산업시설의 가치를 인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현주 박사는 우리나라는 고도의 압축성장으로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것을 짓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건물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고려가 따르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2000년 이후 근대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등록문화재 제도가 도입되는 등 근·현대 문화재의 보존 노력이 시작되면서 산업유산에 대한 가치 인식도 증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석현 교수는 근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늦었던 탓에 우리나라의 많은 근대 자산들은 파괴된 상태라며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보단 아예 새롭게 재건축하려는 경향이 크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엔 우리나라에도 공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재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14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전국 지자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폐 산업시설 등 각종 유휴공간 54개 중 문화공간으로 변화를 계획하는 곳이 당시 33개에 달했다. 또한 올해 6월부터 지역문화진흥원에선 곳곳에 방치된 유휴공간의 문화 시설화를 지원하기 위한 유휴공간 문화재생 활성화사업을 실시해, 국내 폐 산업시설의 미래가치를 검토한 후 그중 11개 지역에 대해 사업 컨설팅 지원을 하고 있다. 이석현 교수는 최근엔 우리나라에도 서구의 성공적인 공간 재활용 사례를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다이러한 노력이 지속된다면 기존 우리나라의 공간 활용 한계도 극복될 것이라 전망했다.

 유휴산업시설을 성공적으로 재활용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 사례도 적지 않다. 선유도 안 폐쇄된 정수장을 주변의 자연경관과 결부해 생태공원으로 재활용한 선유도 공원과 거대한 석유탱크를 문화시설로 탈바꿈시킨 마포 문화비축기지가 대표적인 사례다. 강동진 교수는 이 두 장소는 우리나라에 몇 없는 대형 산업유산을 문화시설로 잘 변형한 모범사례라고 평가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도 기능의 일부를 유지한 채 외부에 공원과 문화시설을 조성하고 있다.

 규모가 작은 폐공장이나 창고 등도 성공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최근 SNS 등지에서 (Hip)한 거리로 소문난 문래동이나 성수동도 소규모의 철강소, 정미소 등 유휴산업시설을 카페와 공방 등으로 재활용해 젊은 층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바뀐 곳이다. 옛 공장의 생생한 흔적을 보존하고, 이를 오히려 여타 장소와 차별화된 미적 요소로 활용했다. 김홍기 교수는 성수동은 옛 공장의 독특한 시설과 흔적을 활용한 우수한 미적 디자인과 공간 자체의 뛰어난 접근성이 결합된 대표적인 성공사례라고 평했다.

 

확실한 콘텐츠와 주민참여 필요해

 근대 산업유산을 활용해 지역을 재생시키고 활성화하려는 여러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휴산업시설을 문화시설로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도 있다. 문화적 콘텐츠를 명확하게 갖추지 못한 채 개발이 이뤄지는 게 대표적이다. 김현주 박사는 맹목적으로 해외 사례를 모방하느라 정작 필요한 문화 콘텐츠가 없는 상황에서 박물관, 미술관 일색의 문화시설로 바꾸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석현 교수는 차별화된 문화적 콘텐츠 없이 산업유산만 강조한 사례는 단기적 흥행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휴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진 성공했음에도 운영에 차질을 겪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강원도 삼척시의 하이원추추파크2012년까지 철도로 운영됐던 영동선을 활용해 산악 레일바이크를 즐길 수 있는 철도 체험형 리조트로 재탄생한 공간이지만, 이외에 방문객을 매료시킬 확실한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비판과 함께 운영에도 난항을 겪었다. 하이원추추파크 관계자는 지금은 개선되고 있지만, 개발과정에서 벤치마킹할만한 철도 재활용사례가 부족해 콘텐츠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고 접근성도 좋지 않아 예측했던 것보다 방문객의 수요가 적었다자연스레 재투자가 줄며 방문객 감소의 악순환이 이어져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산업유산을 문화시설로 재활용할 때, 단순히 관광수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성공적인 정착이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홍기 교수는 산업유산을 재활용할 때 수익은 부차적인 요소로 고려해야 된다당장의 수익보단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에 스며드는 생활공간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이석현 교수도 산업유산을 상업적으로만 활용하려 한다면 오히려 외부인의 유입으로 인해 원주민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산업유산은 지역의 애환을 담고 있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에 착안해, 지역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주민이 참여하는 산업유산 재활용 방안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제시되고 있다. 김현주 박사는 유휴산업시설을 재활용할 때 해당 지역의 문화적 수요에 대한 세심한 파악이 필요하다대도시처럼 인구가 많아야 수요가 유지되는 전시·박물관보다, 지역주민의 실제적 요구를 반영해 지속해서 사용가능한 복지관, 체육관, 마을도서관 등 다각도로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동진 교수도 원활한 주민참여는 주민들이 산업시설이 지역에서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사회 전체에 산업유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대할 것이라며 이곳에서 일했던 선조들로 인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산업유산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더해져야 유휴시설은 비로소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f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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