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 재정지원 총량 확대
학문의 장에서 지역 산업 전초기지로
무색무취 4년제는 ‘고비용 저효율’
지방대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국면전환을 위해 행정·재정적 지원의 전폭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방거점국립대(지거국)를 우선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나 정책 실효성에 대한 우려가 크다. 중앙 정부는 지거국에 재정지원을 몰아주기보다는 고등교육 지원 예산은 늘리되 예산의 구체적인 사용은 지방 정부의 몫으로 넘기기로 했다. 이번 결정으로 한국의 대학 지원 체계는 중대 변곡점을 맞을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대학이 지역 사회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히 반응할지에 정책 성패가 달려있다고 전망한다. 기존의 획일화된 학과 구성에서 벗어나 지역산업과 지역민의 필요에 적극 부응하도록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대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정 나은 지거국이라도 살려야?
지거국은 지방의 권역별 고등교육을 선도하는 역할을 맡아 왔으나 최근 우수 인재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0년 정시 전형 학과별 상위 80% 합격생의 성적을 일렬로 줄 세우면, 인문계열 전국 상위 300개 학과 중 지거국의 학과는 253위의 제주대 초등교육과뿐이었다. 의약학 계열을 제외한 자연계열의 경우에도 지방 거점국립대가 배출한 상위 300개 이내 학과는 3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2009년 지거국은 전국 상위 300개 학과 중 인문계열 34개, 자연계열 21개를 배출했지만 11년 만에 상황은 급변했다.
정치권은 지방과 수도권 간 대학 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지거국 지원에 총력을 쏟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월 총선 공약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발표했다. 9개 지거국의 학생 1인당 교육비를 서울대의 70% 수준까지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2022년 기준 서울대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5804만원인 반면 9개 지거국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최저 1990만원에서 최고 2412만원으로 평균적으로 서울대의 약 34%에 불과하다. 이세영(경북대 전자공학23) 씨는 “지방에선 거점국립대마저 위상이 내려가고 인재들이 안 모이는 상황인데 사립대를 지원하기보단 국립대부터 좋은 학교로 만드는 게 우선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거국 몰락 원인을 두곤 저조한 지원으로 그간 성장 기회가 부족했단 분석이 나온다. 한숭희(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 서울대에 비해 다른 지거국에 대한 국고지원액은 형편없다”며 “전액 장학금, 생활비 지원, 해외교류비 지원 등이 마련되고 경쟁력 있는 교수들을 확보할 수 있다면 현재보다 나은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 말했다. 박시현(경북대 사학23) 씨는 “수도권 대학과 달리 경북대의 경우 고시 준비반에 대한 지원 등이 부족함을 체감한다”고 전했다.
다만 지거국이 현 구조를 유지한다면 재정지원을 확대해도 그에 상응하는 정책 효과를 담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 변기용(사범대 교육학과) 교수는 “국립대에 기대되는 역할은 초기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기초 학문이나 시장 원리에 맡기면 안 되는 분야의 학문에 대해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현재 국립대들은 사립대와 학과 구성이 똑같다”고 지적했다. 경영학과 등 사립대 간 경쟁에 맡겨둬도 충분히 공급되는 학과는 국립대에 있을 이유가 적지만 국립대가 사립대와 동일한 형태로 학과를 편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대신 지자체가 대학 지원 결정
예산 분배 방식엔 여러 이견이 있으나 지방대 재정지원 총량을 늘리고, 지원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덴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고등교육재정 확충 건의서(2022)’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은 고등교육에 학생 1인당 1만1287달러의 공교육비를 투자했다. 공교육비 투자 규모가 OECD 36개국 중 30위에 불과하다. 유성상(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정부는 그간 대학의 재정지원에 있어 학부모의 재원에 의존해 왔고, 착취에 가까운 연구노동력 활용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원인을 진단했다.
사립대에 의존하는 한국의 고등교육 현실 역시 고려해야 한다. 김용(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사립대 비율이 가장 높은데, 우리나라의 사립대들은 학생 등록금 의존 비율이 굉장히 높다”며 “대학교육 지원 예산의 총액을 늘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라 전했다.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에 따르면 사립대는 국내 고등교육 수요의 약 80%를 담당하고 있으며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대학 등록금 및 사립대학교 운영손익 현황 분석(2023)’에 따르면 2021년 비수도권 사립대의 81.3%가 적자를 냈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부터 3년간 지방대 위기 극복을 목표로 ‘고등·평생교육지원 특별 회계(고등교육 특별 회계)’를 한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올해 고등교육 특별 회계엔 15조5000억원의 지출 계획이 포함됐으며 정부는 고등교육 특별 회계 운영을 내년 이후에도 연장하겠단 입장이다.
정부의 예산 지원 방식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2019년 정부가 218개 대학에 지원한 7조4089억원의 예산 중 서울대·고려대·연세대는 16.45%를 가져갔다. 이는 하위 151개 대학에 지원된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지방대에 할당되는 지원액이 크게 늘 전망이다. 지난 2022년 발표된 윤석열 정부의 고등교육 핵심 정책인 ‘지역혁신 중심 대학지원체계(RISE)’에 대학에 대한 행정·재정적 지원 권한 상당 부분이 교육부에서 대학이 위치한 지자체로 이양된다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전체 대학재정지원사업 예산 역시 내년부턴 절반 이상 지역 주도로 집행될 예정이다. 이길재(충북대 교육학과) 교수는 “기존엔 동일한 목적의 사업을 두고 전국 400개 대학이 모두 경쟁하다 보니 우수한 교원과 학생 자원, 사회적 인프라를 갖춘 수도권 대학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며 “이젠 17개의 쪼개진 판 내에서의 경쟁이기에 고른 재정 배분이 기대된다”고 예상했다.
계약학과·평생교육 등 기능 바꿔야
자율성을 갖고 혁신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만큼, 변화에 발맞춰 지방대가 근본적 경쟁력을 갖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미약했던 지역 산업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것이 필수 과제다. 김용 교수는 “중화학과 조선, 자동차산업이 자리한 울산에선 울산대가 노동 인력 공급 역할을 잘 해왔다”고 전했다. 반면 거제의 경우 한화오션(구 대우조선해양)의 연구소가 수도권으로 이전하며 연구개발 인프라와 현장 간 거리가 멀어졌을 때 지역 대학이 그 공백을 메워주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박종필(전주교대 초등교육과) 교수는 “지금 지방대는 똑같은 단과대에 똑같은 전공”이라며 “지역 특성을 반영한 채용 연계 계약학과가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완주 현대자동차 공장이 인접한 전북대의 경우 현대차와의 채용 연계형 계약학과를 만드는 식이다.
지역에 입주한 공공기관의 특성에 맞춰 지방대의 단과대, 학과를 특화하는 방안도 고려해 봄 직하다. 부산국제금융센터 등에 13개 금융·해양·영화 관련 공공기관이 이전한 부산혁신도시와 같이 혁신도시별 특성을 지방대의 학과 구성 등에 참고할 수 있다. 대구혁신도시에 이전한 한국부동산원에서 계약직으로 근무 중인 김초이(대구대 부동산지적학20) 씨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공공기관에 취업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며 “한국부동산원과 같은 지역 공공기관의 특성에 맞춰 대학의 학과를 운영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전했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만큼 지방대의 평생교육 기능 확대도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거론된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며 이직과 전직이 활발해진 만큼 재교육 수요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 교수는 “지역마다 평생학습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지금의 평생학습은 대개 시내에 있는 제빵이나 중장비 학원을 가서 배우는 형태”라며 “지역의 평생교육과 관련해서도 대학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평생교육을 하는 공영형 단과대학과 직업교육을 하는 공영형 전문대학이 뿌리를 내린 후 지방 사립 종합대학의 4년제 구조 역시 유연화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변기용 교수는 “고용보험기금으로 운영되는 덕에 전문대학의 반값 등록금으로 다닐 수 있는 폴리텍대학이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공영형 전문대학이나 폴리텍대학을 2년 다니다가 필요하면 3학년에 공영형 단과대학이나 일반대학에 편입하도록 하면 국가 전체적으로 비용을 줄이고 효율은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글 | 이경준·하수민 기자 press@
사진 | 하동근 기자 hdngg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