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갈 하이>를 보고 있다. 10년 전쯤 일본에서 방영한 코믹 법정물이다. 돈과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짜 변호사 코미카도와 정의감 넘치는 초짜 변호사 마유즈미가 함께 일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매사에 대립하는 두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워 정주행하게 됐다. 두 주인공 중 마유즈미에 더 마음이 간다. 의뢰인을 위해 재판에 이겨야 하지만, 진실도 밝히고 싶은 딜레마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유즈미를 보며 기자를 꿈꾸던 대학생 때 내 모습을 떠올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4년 세월호 사건. 이때를 기점으로 기자의 이미지는 급격히 추락했다. 인간성을 상실한 지나친 단독 경쟁에 매몰돼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기레기’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외당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의 역할은 여전히 가치 있다고 믿었다. 특종 기자보다는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기자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나는 사람이 두려웠다. 처음 만나서, 거절이 무서워서, 왠지 피해를 주는 거 같아서, 꺼낼 말이 없어서. 먼저 연락은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일은 마지막까지 미뤘다. 취재원과의 식사보다 혼밥이 더 편했다. 기자로서는 낙제점이다.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니 하루하루 고통이었고, 회사에서도 눈치가 보였다. “네가 몇 년 차인데 아직도 그 모양이냐?” 그렇게 고민이 심해질 때쯤 회식 자리에서 한 선배의 질책을 들었다. 그때 마주한 내 모습은 예전에 꿈꾸던 기자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돌이켜보면 코미카도든 마유즈미든 방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지난주 KBO 한국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가을 야구는 모든 선수의 꿈이지만, 누군가에게 가을은 끝을 의미한다. 이 시기가 되면 모든 팀이 방출 명단을 발표한다. 프로 지명, 1군 승격, 주전 확보까지 높은 벽을 넘지 못한 선수는 차례차례 사라진다. 하지만, 이들에게 실패는 또 다른 시작이 되기도 한다. 지난해 우승 팀인 LG 트윈스의 염경엽 감독은 통산 타율이 2할도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선수였지만 지도자로 더 큰 성공을 거뒀다. 1군 무대를 밟지 못하고 은퇴한 민우혁은 뮤지컬 배우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나 역시 기자의 삶은 실패로 끝났지만, 인생 전체로 보면 이제 겨우 삼진 한번을 당했을 뿐이다.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지금, 나에게는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까.
<낫아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