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해 고고미술사 전공
청년 지원하고자 갤러리 개관
“국제 예술 교류 플랫폼 만들고파"
지난 2022년 논밭이 펼쳐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한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박은지(고고미술사학과 02학번) 큐레이터의 ‘갤러리 아트14’다. 이곳에서 그는 작품 활동을 하는 청년 작가들을 위해 낮은 대관료를 유지하고, 정기적으로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박은지 큐레이터는 “감정과 감성을 풍성하게 하려면 예술이 필요하다”며 “가까운 동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방문해 책을 읽고 작가를 이해해 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고 전했다.
역사 콘텐츠 기획 꿈꾼 유년 시절
“천문학 박사 아버지와 교향악단 단원 어머니는 작품 수집가셨어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저와 동생은 부모님을 따라 미술관과 박물관을 많이 다녔죠.” 박은지 큐레이터는 유년 시절부터 예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처음으로 예술에 꿈을 품은 건 초등학교 시절, 가족과 함께 광주 시립미술관 마르크 샤갈전을 찾았을 때였다. 샤갈의 작품에서 감명을 받은 그는 미술 수행 평가 과제로 전시회에서 느낀 감상을 엽서에 적어 제출했다. “엽서를 본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문화예술을 글로 담아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됐어요.”
중학생 때 KBS 1TV <UHD 역사스페셜>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후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역사 콘텐츠를 기획하는 방송 작가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고등학교에선 ‘역사 콘텐츠 제작을 위해선 먼저 역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임했죠.”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입학 후 박은지 큐레이터는 팀을 꾸려 답사와 발표를 진행하는 전공 강의에 매료됐다. 그는 경주시 남산 답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소회를 밝혔다. “교수님, 동기들과 불교문화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며 남산을 돌아다녔어요. 경쟁 구도에서 벗어난 소통형 활동은 정말 즐거웠죠.” 학업에 대한 그의 열중은 남달랐다. “고등학생 때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요. 한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것에만 몰입하고 파고드는데, 고고미술사학이 딱 그랬습니다. 방학마다 계절학기 강의를 듣고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정도였거든요.”
대중에게 직접 경험한 지식 전하고파
방송 작가가 꿈이었던 박은지 큐레이터는 대중에게 높은 수준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대학원 면접 당시 교수님이 ‘고구려사는 사료가 부족한데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라고 물어보셨어요. ‘중국으로 귀화해서라도 연구할 것’이라 답했죠. 차갑게 앉아계시던 교수님들이 제 대답을 듣고 하나같이 빵 터지시더라고요.”
최우수장학생으로 고고환경연구소 연구원이 된 박은지 큐레이터는 2004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선 지도교수인 최종택(문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와 광개토대왕릉비와 돌무지무덤 등 고구려 유적을 답사했다. “저는 경험주의자거든요. 실전 경험 없이 이론으로만 유물을 공부하는 건 반쪽짜리 연구라 느꼈어요. 반쪽짜리 지식보단 제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귀국 후엔 충남 아산에 있는 갈매리 유적 연구에 매진했다. 갈매리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대규모 취락 유적이 묻혀 있었다. “교수님들과 함께 아차산 유적을 발굴했을 때가 기억에 남아요. 방송국에서 작업하는 저희를 촬영해 가기도 했거든요. 나중에 보니 작업하는 엉덩이만 나와 있어서 웃기기도 했지만, 그냥 땅을 파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한다는 생각에 자긍심을 느꼈습니다.”
박은지 큐레이터가 속한 고고환경연구소는 2005년 ‘경자년 고구려 명문 토기’를 발굴했다. 제작 시기가 불분명했던 다른 토기들과 달리 ‘520년 경자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연도가 확인된 토기가 발견되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사료 부족으로 연구 지속에 큰 갈증을 느끼던 고구려학 연구자들에겐 단비 같은 발굴이었죠.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고구려 사료를 찾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아차산 발굴 학술 보고서를 작성하던 중 그는 학계에서만 지식을 공유하기보단 대중에게 유물을 알리는 데 앞장서야겠다고 결심했다. “발굴한 유물을 전시관에 어떻게 전시하고, 어떤 콘텐츠를 기획할지, 방문객들에게 나눠줄 안내 책자엔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계속 고민했어요. 방문객들이 유물을 어려워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요.” 전통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출판 기획 전략 등을 연구한 박 큐레이터는 어느새 미디어를 통해 지식을 전달하는 방송 작가보다는 예술로 직접 대중과 소통하는 큐레이터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청년 작가의 지원군 된 ‘갤러리 아트14’
박은지 큐레이터는 박사 수료 후 ‘갤러리 리채’에서 2년간 큐레이터로 근무했다. 박 큐레이터는 그곳에서 청년 작가들의 현실을 마주했다. “전시관 대관 비용이 일주일에 300만 원에서 3000만 원 정도 해요. 재능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전시를 열지 못하는 청년 작가들이 많았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2019년 봄, 담양군에 ‘갤러리 아트14’를 열었습니다.”
‘갤러리 아트14’는 박 큐레이터의 애정이 듬뿍 담긴 이름이다. “담양에 있는 부모님 댁의 지번 주소가 14라 처음엔 번지수에서 착안했어요. 아버지께서 14가 미래로 가는 숫자라고 하셔서 더욱 마음에 들었죠. 아폴로 13호는 실패했지만, 그 이후 모든 단계에선 성공을 거뒀거든요. 13 다음 숫자가 14니까 미래로 가는 숫자죠.”
‘갤러리 아트14’ 대관료는 타 갤러리 대관료의 3분의 1 수준이다. 전기세나 수도세 정도만 받는 경우도 있다. 관람료도 없어 전시회를 찾은 방문객들은 작품을 무료로 관람한다. “‘갤러리 아트14’의 매력은 청년 작가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이 났어요. 이젠 항상 예약이 꽉 차 있습니다. 저렴한 대관료를 보고 청년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자체에서 대관 연락이 오기도 해요.” 2022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으로 갤러리를 이전했지만 운영 방식은 그대로다. 담양 갤러리를 찾던 작품 수집가들도 이젠 화순으로 향한다.
박은지 큐레이터는 2021년부터 꾸준히 전국 단위 청년 작가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 “공모전을 통해 청년 작가들이 여러 작품을 보고 새로운 시각을 얻어 가길 바라는 마음에 시작했습니다. 한 지역에서만 작업을 하다 보면 자신의 작품 세계에 매몰되기 쉽거든요.” 외부 교수진과 함께 심사위원단을 꾸려 최종 4명의 청년 작가를 선정한다. 박 큐레이터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야영장에 작업실을 두고 대형 설치 미술 작품들을 제작하는 임호섭 작가가 기억에 남는다. “자연 속에서 뚜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본인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임호섭 작가님에게 놀랐어요. 작가는 작품뿐 아니라 마케팅과 전시도 스스로 해야 하는 직업인데 꾸준히 본인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인상깊었죠.” 연필과 색연필처럼 간단한 재료로 이국적인 만화풍 그림을 그리는 정지은 작가도 함께 언급됐다. “사람이 토끼 귀를 가지고 있는 등 정 작가님의 작품은 상상력을 자극하죠.” 두 작가는 2021년 제1회 청년 작가전에 당선돼 ‘갤러리 아트14에서’ 2주간 초대전을 진행했다.
루브르 박물관 전시로 시야 넓혀
박은지 큐레이터는 전남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지난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작가 10명의 작품을 전시했다. “청년 작가들의 작품과 더불어 40~50년 동안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 오신 중견·원로 작가님들의 작품을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했습니다. 작품 선정부터 전시까지 직접 담당해 힘들기도 했지만 뜻깊은 경험이었죠.”
파리에서 경험을 통해 박은지 큐레이터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됐다. “프랑스에선 작품 한 점도 마트에서 사는 것처럼 저렴했어요. 작품의 크기로 가격을 책정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 것을 깨닫고, 예술 교류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졌죠.” 박 큐레이터의 다음 목표는 국제 교류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미술관 운영이다. “미술관을 지어 국제 교류 전시를 열고 싶어요.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교류를 통해 서로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예술을 하나의 주제로 모아 전시회를 여는 것도 고려 중이다. “음악이나 문학, 미술을 분절적으로 볼 순 없어요. 예술 안에서 뭉뚱그려지는 것들이죠. 예를 들자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읽고 느낀 감정을 음악으로, 미술로 표현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를 여는 것 등이 있겠죠. 그런 융복합적인 전시를 열어보고 싶습니다.”
글 | 이다연 기자 dadada@
사진제공 | 박은지 큐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