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반도체 특별법 제정안 심사에서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 포함 여부를 두고 여야의 의견이 갈렸다. 예외 조항이 반도체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목소리와 큰 효과 없이 근로자 건강만 해칠 것이라는 의견이 공존하는 가운데 고려대 학생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근로시간 유연화가 곧 반도체 경쟁력 - 고영빈(사범대 역교23)
반도체 특별법은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한국 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보조금 지급과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을 두고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경직된 주 52시간 근무제 속에서 반도체 경쟁력을 잃고 있다.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 R&D 성과가. 줄었다고 응답한 기업의 비율은 75%에 이른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시장 점유율은 높지만, 종합 경쟁력은 하위권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종합 경쟁력은 조사 대상 6개국 중 5위다. 시장 점유율과 종합 경쟁력 사이의 큰 괴리는 규제에서 비롯된다. 경쟁국인 일본은 고소득 근로자에게 주 40시간 기준과 초과근로수당 등의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대만 TSMC에는 R&D를 24시간 풀가동하는 나이트호크 프로젝트와 주 70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근로 문화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는 보조금 등의 금전 지원보다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이 더욱 절실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반도체 기업이 큰돈을 투자해 신제품과 신기술을 개발하더라도 문제가 발견되거나 고객사 요청이 있으면 가용 인력을 신속히 투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도체 산업은 집중근무가 반복돼야 하는 구조이기에 주 52시간 근무제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반도체 R&D 분야에만 국한해 근로 시간 총량을 늘리지 않는 범위에서 노사 합의를 전제로 적용하자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동계는 한 번의 예외 적용이 주 52시간 근무제 전체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정계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느냐”라고 말했다가 불과 일주일 만에 “장시간 노동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입장을 180도 전환했다.
불가승재기 가승재적. 적이 승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고 내가 승리하게 되는 것은 적에게 달려있다. TSMC가 글로벌 1위 파운드리를 굳건히 유지하는 이유와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때도 손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을 통해 한국은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고 경쟁국을 견제할 수 있다.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근로 시간 유연화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52시간 예외 조항의 허점, 함정이 될 수 있다 - 송수원(문과대 철학23)
지난달 20일 국정협의회 4자 회담에서 반도체 특별법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대상에서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을 제외하자는 조항에 대한 의견 차이가 크다. 반도체 산업은 고객사와 기간별로 계약을 체결한 뒤 생산을 시작한다. 해당 조항을 반도체 산업에 예외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요 이유는 산업 특성상 납품 기일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납기 지연의 가장 큰 원인은 부품 공급에서의 병목 현상이다. 우리나라는 반도체의 소재를 중국, 대만 등에서 수입하는데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부품사에 재고가 부족해지면 공급 지연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이는 근로 시간을 늘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부품에 기업이 중점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반도체 산업에 맞춘 공급망을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회담에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주 52시간 특례가 포함되지 않으면 반도체 특별법이 아닌 ‘반도체 보통법’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안의 다른 주요 내용인 반도체 기업에 대한 연구 개발 지원 방안들을 시행해야 투자 부담이 큰 반도체 부품에 관한 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고 고객의 요구에 맞춘 신상품 개발에 대한 투자 및 인력 확보도 가능해진다.
조항 자체의 문제점도 크다. 이 조항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며 신상품 또는 신기술의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자’를 대상으로 당사자 간 서면 합의를 전제로 하며, 건강권 보호는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돼 있다. 그러나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이나 일본의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와는 달리 명확한 소득 기준이 제시되지 않아 적용 대상의 범위가 모호하다. 조항 적용 여부를 당사자 간 합의에 의존시키는 것도 근로자가 원치 않는 노동을 강요받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건강권을 ‘법률’로 보장하는 일본과 달리 ‘대통령령’으로 건강권을 정하면 정부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될 수도 있다.
결국, 명확한 기준을 갖추지 못한 특별법 내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조항은 반도체 산업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이바지하기보다는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는, 돌이킬 수 없는 함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납기를 맞추고 고객의 요구에 즉각 대응해야 하는 산업은 많다. 주 52시간 근무제 논의는 반도체 특별법에 포함해 의논할 사항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나 새로운 제도 측면에서 따로 다뤄야 하며 지금은 특별법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 다른 조항들에 주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