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정 개편으로 학력저하 우려
입시 제도가 부담 키운다는 분석도
“고교-대학 과정 연계 확대해야”
올해부터 고려대 자연계 신입생은 수학 교과목 기초학력 진단평가를 받는다. 전공 학습을 위한 기초 학업 역량이 부족해 전공 과목을 버거워하는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함이다. 최병호 고려대 공과대 교학부학장은 “수학 교과목의 기초학력 성취도가 부족한 학생들에게 맞춤형 지원을 제공해 전공 학습의 효율성을 높이고 학업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학생의 기초 학업 역량이 부족하다는 현실은 비단 고려대만 주목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양대는 전공 학습을 위한 기반을 가르치기 위해 2022년 공과대학 전공 기초 필수 과목에 고등학교 과정을 추가했다. 경북대는 2021년 물리학과와 물리교육과 교수진이 비교과 과목으로 ‘수학있는 기초 물리’ 과목을 개설해 입학 전 수학을 공부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고, 학부 교육과정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대학 교육 현실에 역행하는 중등 교육과정 개편을 멈추고 고득점만이 목적인 대학 입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공 수업 힘들어하는 이공계 대학생들
이공계 학생들이 중등 교육과정과 대학 교육과정 간 괴리로 인해 전공 수업 수강을 힘들어하는 현상은 적지 않다. 지난 학기 정역학 과목을 수강한 강승민(한양대 ERICA 건설환경공학22) 씨는 “물리를 고등학교 때 잠깐 배우고 수능 때 선택하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며 “유튜브를 통해 관련 강의 영상을 시청하며 전공 수업에 필요한 지식을 보충했다”고 말했다. 김동석(대구대 전자전기공학21) 씨는 “고등학교 때 학습한 물리학Ⅰ과 대학 전공과목 간 괴리가 커 학습 부담이 컸다”며 “전공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전자기학과 회로 이론 내용을 K-MOOC와 사교육 업체의 인터넷 강의로 학습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을 위한 사교육도 활성화된 상태다. 메가스터디교육 산하 대학 인터넷 강의 전문 사이트인 유니스터디 관계자는 “2016년 처음 서비스를 개시했을 때 회원 수는 연간 1000여 명 수준이었지만 2022년에는 1만7000여 명, 2024년에는 3만2000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는 추세”라고 밝혔다.
대학 교육 현장에서도 전공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수란(경북대 물리교육과) 교수는 “고등학교 과학 및 수학 과목의 전체 범위가 줄면서 대학 교육 수준과 괴리가 생겼다”며 “교수들 사이에서도 기초 지식을 쌓고 오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의 수업 이해도 격차가 상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전했다. 최병호 교학부학장은 “일부 학생들이 2학년부터 수강하는 역학 기반 전공 과목 수강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중등 교육과정 개편 필요해
중등 교육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해도 학업에 어려움을 느끼는 건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학습하는 내용 사이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2009 개정 수학과 교육과정에선 학습 부담을 줄이겠단 이유로 일차변환과 행렬 등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이 다수 삭제됐고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선 공간 벡터 등이 필수 학습 내용에서 제외됐다. 오병권 당시 서울대학교 수리과학부장은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공계 대학을 위한 기본 소양을 아예 없애버린 것”이라며 “인공지능과 기계 학습의 기본을 모르는 학생들이 진학하게 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현행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학습 내용이 감축되는 경향이 전공 학습 부진을 심화한다고 지적한다. 최병호 교학부학장은 “교육과정을 획일화하거나 수학 및 과학 교과목의 깊이를 낮추려는 경향을 개선해야 한다”고 전했다. 김수란 교수는 “2009 개정 교육과정과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삭제된 내용은 대학 교육과의 연계성이 크다”며 “연계되지 않은 교육과정으로 인해 학업 성취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배우지 못한 내용을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도 대학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심화된 내용을 스스로 학습하고 연구하는 곳인 대학이 학업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수란 교수는 “대학에서 기초 내용을 전부 가르치면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며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했을 때 학업 부담을 덜기 위해서는 중등 교육과정에서 학습하는 범위를 다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행렬이 다시 부활했다. 상문고등학교 수학교사 이현근 씨는 “2009 개정 교육과정 이전에 있었던 행렬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웠다”며 “대학에서 행렬을 중요하게 다루는 현실을 반영해 간단한 개념만 학습 영역으로 가지고 온 좋은 변화”라고 평가했다.
문과화되는 수능도 손봐야
대학 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도 문제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마지막으로 적용된 수능인 2020학년도 수능과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 첫해인 2021학년도 수능에서 자연계 수험생은 수학 영역 ‘가형’과 과학탐구 영역 8개 과목(물리학Ⅰ·Ⅱ, 생명과학Ⅰ·Ⅱ, 화학Ⅰ·Ⅱ, 지구과학Ⅰ·Ⅱ) 중 최대 두 과목을 택해야 했지만 2022학년도 수능부터 2027학년도 수능까지 수학 영역은 공통 문제 22개 문항에 더불어 3개 과목(미적분, 기하, 확률과 통계) 중 하나만 택한다. 탐구 영역에선 사회탐구 영역과 과학탐구 영역을 통틀어 최대 두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이기수(이과대 물리학과) 초빙교수는 “현행 수능에서는 사회탐구 과목을 응시해도 이공계 학과에 진학할 수 있다”며 “고등학교 때 물리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은 학생들이 기계공학과 같이 물리학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전공을 선택한 경우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선택과목 제도가 전면 폐지되는 2028학년도 수능에선 중등 교육과 대학의 학업 연계성이 더욱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014년부터 2년간 서울대 입학본부장을 지낸 권오현(서울대 독어교육과) 명예교수는 “2028학년도 이후 수능에선 미적분II , 기하 등 심화수학이 모두 수능과목에서 제외되고, 1학년 때 배우는 통합과학만 치르게 돼 이공계 전공별 학업 능력을 변별하는 장치를 잃게 될 것”이라며 “2~3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선택과목 대신 1학년 때 배운 통합과학 내용만 반복 학습해 수능 성적과 대학 이공계 학업의 연계성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심규철(국립공주대 생물교육과) 교수는 “현재 고등학교에서는 대학 진학 후 학습을 고려하기보다 당장 수능에서 점수를 잘 취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있다”며 “수능에서 통합과학만 다루면 대학에서는 지금보다도 더욱 낮은 학력 수준을 가진 학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중등 교육과정을 확대해 대학 교육과의 연계를 늘리는 한편 수능을 세분화해 학업 역량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수란 교수는 “고등학교에서 보다 넓고 다양한 범위를 배워야 대학 진학 후 활용성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기수 초빙교수는 “현재 입시 시스템은 학과와 관련한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는 제한이 없다”며 “정부에서 학과를 분류하고 해당 학과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선우 기자 thes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