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의 어느 강의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눈물이 핑 돌 줄은 몰랐다. 교양 수업 ‘프랑스문화탐색’, 1차 산업혁명기를 다룬 그날의 강의는 유독 생생했다. 교수님의 말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당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가늠하던 찰나 교수님께서 영화의 일부분을 보여주셨다. <레 미제라블> 속 ‘민중의 노래’였다.
화질도 떨어지고 음향도 좋지 않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엔 분명히 ‘진심’이 있었다. 영화 속 민중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기의 인물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억눌린 사람들, 들끓는 외침, 절박한 얼굴들. 나는 그 장면을 단지 연기가 아니라 현실처럼 받아들였고, 그 감정이 크고 깊게 나를 흔들었다. 영화 속 바리케이드는 높았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깃발을 흔들었고 서로를 잡아주며 노래를 불렀다. 교수님의 설명도, 영상의 화질도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들과 함께 거리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북소리와 울려퍼질 때 내일이 오면 시작될 새로운 삶이 있네!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우리가 꿈꾸던 세상 있을까?” 가사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깊게 박혔다. 영화 속 그 울창한 목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분노와 슬픔, 고통과 희망이 얽힌 군중의 합창이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그 울림이 강의실 스피커를 뚫고 내 가슴을 두드렸다. 사람들이 단 하나의 이유로, 단 하나의 목소리로 하나가 되는 그 장면은 나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무언가 위대한 것을 본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이상하게도 부끄러웠다.
왜일까. 돌이켜보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서는 그런 장면을 보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터넷을 켜면 혐오와 조롱이 만연하고 누군가의 약함은 공격의 구실이 되기도 한다. 각자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고 ‘연대’란 단어는 촌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누군가 깃발을 들면, 그 옆에 함께 서는 사람보단 조롱하는 이들이 더 많아 보인다. 그렇기에 그날의 그 노래는 나에게 더 큰 울림을 줬다. “미래는 약한 이들에겐 불가능이고, 겁쟁이들에겐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용기 있는 이들에게 미래란 이상의 실현이다.” <레 미제라블>의 원작자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민중의 노래를 들으며 잊고 있었던 마음을 만났고 위고의 문장을 읽으며 그 마음에 이름을 붙였다. 미래는 아직 용기 있는 이들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용기를 아직 잃지 않았다.
양예진 기자 yerielver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