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 이탈·고령화로 소멸 위기

임대료 상승·재개발이 폐업 부추겨

“도시 활력 위해 제조업 지켜야”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에서 봉제 업체를 운영하는 김춘화(여·55) 씨는 "일감이 없고 공임이 낮아 주위에 문을 닫은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에서 봉제 업체를 운영하는 김춘화(여·55) 씨는 "일감이 없고 공임이 낮아 주위에 문을 닫은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에는 16만 명의 도시형 소공인이 있다. 숙련 기술을 가진 이들은 노동집약적이고 소규모인 제조업 사업체에 종사한다. 의류봉제, 기계금속, 인쇄, 주얼리, 수제화·가방 등으로 구성된 도시제조업은 서울 제조업 사업체의 94.8%를 차지한다. 그러나 수요 감소와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폐업이 늘어나고 열악한 노동 여건으로 인력이 이탈하며 위기에 처했다. 이호정 한국경영기술지도사회 소상공인특별위원장은 “도시제조업 쇠퇴를 막으려면 국가가 R&D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생산성과 제품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흔들리는 한국 제조업 뿌리

  도시제조업은 한 지역에 동종 사업체가 모여 서로 다른 공정을 책임지는 특성이 있다. 서울에는 영등포구 문래동(기계금속), 종로구 봉익동·묘동·원남동(주얼리), 성동구 성수동(수제화·가방) 등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정한 소공인 집적지구 53곳 중 14곳이 있다. 자재 조달부터 완제품 생산, 납품까지 하루 안에 진행되는 빠른 속도는 도시제조업의 강점이다. 배웅규(중앙대 도시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도시제조업 공장은 특정 지역에 모여 있어 긴밀한 협력과 빠른 생산이 가능하다”며 “주로 교통이 원활한 도심에 위치해 완제품을 수요자에게 빠르게 납품할 수 있다”고 했다. 소규모 맞춤 생산 역시 강점 중 하나다. 배 교수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 시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상세히 주고받으려면 도시 안에 작은 공장이 필요하다”며 “도시제조업은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하는 실험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도시 안에서 혁신의 전진 기지로 역할하는 도시제조업이 최근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통계청 전국사업체조사에 따르면 서울 5대 도시제조업종의 상시근로자 10인 미만 사업체 수는 2020년 7만4594곳에서 2023년 6만2823곳으로 줄어 3년 만에 15.3%가 사라졌다. 같은 기간 종사자도 11만1698명에서 8만6340명으로 22.7% 줄었다.

  인건비 부담으로 신규 인력 채용도 어려운 가운데 도시제조업은 종사자 고령화로 소멸이 빨라질 위기에 처했다. 2020년 서울 도시제조업 사업체 중 대표자 연령이 50대 이상인 곳은 전체 69.8%였다. 노동집약이란 산업 특성상 고령화가 지속되면 생산성 하락은 불가피하다. 유지용 서울패션섬유봉제협회장은 “봉제업은 청년 인력이 거의 진입하지 않고 기존 인력만으로 버티고 있어 작업 속도나 품질 면에서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축적된 숙련 제조 기술이 사라진다는 우려도 있다. 2024년 도시형 소공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도시형 소공인의 33.5%가 기술을 전수할 의향은 있지만 전수할 대상이 없다고 응답했다. 기술을 전수할 의향이 없다는 응답자도 28.2%였다.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기어 가공 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아들이 가끔 일을 돕지만 악취와 너저분한 환경 탓에 오래 일하기 꺼린다”며 “내가 그만두면 사업 운영도 끝날 것 같다”고 했다. 최용희 도심권 서울특별시 노동자 종합지원센터 정책연구팀장은 “기술을 이어받을 젊은 인력이 유입되지 않으면 수십 년 내 숙련 기술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시제조업의 쇠퇴는 결국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호정 위원장은 “소규모 도시제조업은 국내 대기업·중소기업에 필요한 부품을 빠르게 만들고 저렴하게 납품해 한국 제조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다”며 “도시제조업이 사라지면 필요한 부품 수급을 위해 해외를 찾는 등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일감·인력 줄고 도심에서 밀려나

  도시제조업 종사자들은 과거에 비해 일감이 확연히 줄었다고 입을 모은다. 김윤중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예전엔 책으로 보관·공유하던 자료를 디지털 파일로 저장·전송하면서 인쇄 물량이 대폭 줄었다”고 말했다. 중구 필동에서 인쇄업체를 운영하는 유명식(남·74) 씨도 “바쁘던 시절에 비하면 일감이 반의 반토막 수준이라 직원이 절반가량 줄었는데도 일에 비해 직원이 많다”고 했다.

  저렴한 해외 제품의 한국 시장 유입도 일감 부족을 심화했다. 성북구 종암동에서 자수 업체를 운영하는 정낙훈(남·58) 씨는 “사람들이 알리, 테무에서 저렴하게 옷을 사다 보니 일감을 주던 신촌·명동의 옷 가게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도 인건비가 국내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해외를 찾고 있다. 같은 지역에서 봉제 업체를 운영하는 김춘화(여·55) 씨는 “삼성물산 등 대기업에서 몇십만 장씩 의류 제작을 주문하던 과거와 달리 기업들이 해외를 찾다 보니 물량 주문이 적다”고 했다. 공임은 수십 년 전 수준인데 생산 비용은 늘어 영업이익도 줄고 있다. 정낙훈 씨는 “20년 동안 실, 원단 등 자재비가 4배 오르는 사이 공임은 그대로라 인건비, 관리비를 빼고 나면 마진이 안 남는다”고 했다.

  매출 감소로 나빠진 노동 여건은 인력 이탈로 이어졌다. 도시제조업 사업체는 인건비를 감축하려 근로 시간을 줄이거나 고용 형태를 정규직에서 임시직으로 바꾸고 있다. 김성복 서울봉익주얼리소공인특화지원센터장은 “주얼리 업계 경기가 좋지 않아 종로 주얼리 업체의 절반 이상이 주4일제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유지용 회장은 “봉제업에선 정규직 근로자를 임시직으로 바꿔 인건비를 아끼는 일이 잦다”며 “임시직으로 전환된 직원은 생계를 위해 미화원, 요양보호사 등 타 업종으로 전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업주가 생존을 위해 인건비를 감축하는 상황이라 노동 여건 개선 사업도 유명무실하다. 대다수 사업이 임시직·객공 등을 상시근로자로 등록해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용희 팀장은 “사업주가 직원 복지를 위해 임시직 인력을 상시근로자로 등록할 여유가 없다”며 “산업이 살아야 노동 여건도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

  도시제조업 사업장이 도심에서 밀려나는 현상도 심각하다. 종로구 봉익동에서 주얼리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서희주(남·52) 씨는 “최근 서순라길이 관광 명소가 되면서 주얼리 공장 자리에 음식점과 카페가 많이 생겼다”고 말했다.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기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공작기계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장용석(남·59) 씨는 “창업하는 사람이 늘어 임대료가 오르자 고령 사업주는 공장을 이전할 바에 일을 그만둔다”고 했다.

  재개발로 인한 집적지 철거가 도시제조업 생태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윤동열(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2018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철거 이후 파주 인쇄단지로 이동한 많은 인쇄업체가 납품이 늦고 기존 협업 업체와의 네트워크가 깨져 경쟁력을 잃었다”고 했다. 기계금속 집적지인 문래동과 인쇄업 집적지인 중구 을지로·충무로 일대는 재개발 대상지로 지정돼 빠르게 쇠퇴할 가능성이 크다. 김윤중 이사장은 “인쇄 기계를 옮기는 데 수천만 원이 든다”며 “자체 조사 결과 중구 인쇄업체 중 17%가 재개발이 진행되면 일을 그만둘 것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서울시 중구 필동 소재의 한 인쇄 공장. 김윤중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재개발에 앞서 기계를 옮길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중구 필동 소재의 한 인쇄 공장. 김윤중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재개발에 앞서 기계를 옮길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 외면하는 소공인 지원 정책

  중소벤처기업부와 서울시가 여러 도시형 소공인 지원 정책을 펴지만 실효성을 지적받고 있다. 줄어든 수요를 보전하기 위해 중소벤처기업부가 마련한 판로 개척 지원은 영세 사업체에 종사하는 소공인이 활용하기 어렵다. 김성복 센터장은 “주얼리 업계는 한두 명이 운영하는 영세 사업체가 대부분이라 수출로 판로를 개척하기보다 ‘반지 하나 더 만든다’는 사업주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판로 개척이 도시제조업 수요 감소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단 지적도 있다. 이호정 위원장은 “원자재를 가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소공인에겐 제품 연구·개발이 근본적인 대책이지 판로 개척은 진통제와 다름없다”고 했다.

  도시제조업 집적지가 재개발 지역과 겹쳐 지원에서 외면받기도 한다. 김윤중 이사장은 “2023년에 중구를 인쇄업 집적지구로 지정해 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했지만 세운지구 재개발 문제와 충돌해 지정받지 못했다”며 “집적지구가 아닌 탓에 소공인지원센터 설치 등 지원에서 배제됐다”고 말했다. 문래동 소재 철공소 1300곳을 대규모로 이주하는 대책도 부작용이 예상된다. 윤동열 교수는 “도심에서 일하던 숙련 인력이 통근과 이주 비용으로 이탈할 수 있어 점진적이고 자발적인 이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속 가능한 도시를 위한 제조업

  도시제조업의 쇠퇴를 막으려면 경쟁력 강화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영세 사업체가 집적한다는 특성을 살리면 업체 간 협력으로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 이호정 위원장은 “도시제조업의 단점은 똑같은 부품을 만들어도 업장마다 서로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라며 “여러 사업체가 각자의 기술력을 공유하고 공동의 제품을 연구·개발해 품질로 인정받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기업의 수요를 충족하려면 제조 공정 디지털화도 필수다. 이호정 위원장은 “중소기업·대기업에서 일감을 꾸준히 받으려면 기업의 공급망 관리 방식에 맞게 생산 현황과 재고를 전산화해야 한다”며 “고령자도 사용하기 쉽도록 단순한 UI를 개발하면 도시제조업도 디지털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시제조업 활성화 목적이 아닌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제조업을 내쫓지 않는 재개발 방안이 필요하다. 배웅규 교수는 “과거 노후화를 이유로 주거 단지로 재개발한 지역은 주거와 일자리의 분리로 인한 도심 공동화, 주차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며 “도심에 주거 기능과 상업 시설만 남길 것이 아니라  메이드 인 뉴욕시티(Made in NYC) 정책처럼 일자리를 창출하는 제조업을 함께 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이드 인 뉴욕시티는 정부가 뉴욕시의 부지를 사들인 뒤 NGO가 관리하며 도시제조업에 저렴하게 세를 주는 공공임대 사업이다. 뉴욕시가 청년을 끌어들이고 도시를 창업과 혁신의 공간으로 만들 목적으로 시행했다.

  서울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은 2023년 서울시에 세운지구 녹지 개발 시 지하 1층부터 지하 3층을 인쇄업 단지로 조성해 공공임대를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윤동열 교수는 “도시제조업 종사자의 대부분 1년 수입이 3000만 원도 안 되는 취약계층”이라며 “민간 재개발 시 영세 제조업체가 일정 비율 이상 입주하도록 공공이 관리해 취약계층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글 | 황다희 기획1부장 tender@

사진 | 박인표 기자 inpyo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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