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지연 속 갈등 반복

계정 권한 승계 놓고 의견 분분

“유산 상속자 생전에 지정해야”

 

 

  디지털 유산은 소셜미디어 계정, 이메일, 가상 자산 등 고인이 생전에 남긴 모든 디지털 자료를 일컫는다. 스마트폰과 온라인 서비스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개인이 남기는 디지털 흔적은 꾸준히 늘고 있다. 유족이 디지털 유산 상속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지만 이를 규율하는 법률이 없어 정보를 관리하는 기업과 유족의 분쟁이 반복되고 있다. 디지털 유산 상속의 핵심 쟁점은 계정 정보·사진·메시지 등 인격적 요소가 강한 자료를 상속 대상에 포함할 수 있는지 여부다. 학계에서는 재산적 가치가 있는 정보만 승계해야 한다는 시각과 인격적 가치가 담기더라도 유족의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법 공백에 기업·유족 충돌

  이태원 참사 유족은 희생자의 사망 원인과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애플을 상대로 아이폰 잠금 해제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유족 측은 휴대전화에 대한 권리를 상속받았으므로 잠금 해제 청구권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제기 당일 소송을 취하했다. 법원이 유사한 소송에서 줄곧 애플의 손을 들어줘 결과를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후에도 비슷한 문제가 반복됐다. 유족은 고인의 연락처 목록 열람을 요구했으나 카카오·네이버·삼성전자는 이를 거절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중재 끝에 삼성전자와 카카오는 희생자의 휴대전화와 카카오톡에 저장된 연락처에서 이름 등 구체적 정보를 제외하고 전화번호만 유족에게 제공했다. 애플도 소정의 서류를 확인한 후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 목록을 제공했다.

  고인의 디지털 유산을 둘러싼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는 관련 법률이 없기 때문이다. 김은수 서울대 인공지능신뢰성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개인정보보호법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죽은 사람의 데이터 처리 방안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며 “디지털 유산 상속 문제를 현행 법률로 풀어내기는 어렵다”고 했다.

  디지털 유산을 유족에게 넘겨줄 법적 근거가 없어 기업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사망자의 데이터에 포함된 제3자의 개인정보가 유출될 것을 우려하는 탓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김은수 연구원은 “기업이 죽은 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는 없지만 그 안에 포함된 제3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는 있다”며 “유족에게 디지털 유산을 제공하면 법 위반이 될 수 있어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회는 오랫동안 디지털 유산 관련 입법을 시도했지만 법 개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세 건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모두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들 개정안의 골자는 사망자의 정보에 대한 유족의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최현태(가톨릭관동대 경찰행정학전공) 교수는 논의가 길어지는 이유에 대해 “법 개정 시 개인정보보호 정책뿐 아니라 기업의 데이터 관리 체계도 고쳐야 하기 때문”이라며 “논의가 답보하는 사이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며 갈등과 행정력 낭비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했다.

 

  학자마다 상속 가능성 해석 갈려

  디지털 유산 상속 법제화를 둘러싼 핵심 쟁점은 유산의 성격에 따른 상속 여부다. 민법 제1005조는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재산에 관한 포괄적 권리·의무를 승계하되 피상속인의 일신에 전속한 것은 그렇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집, 예금 같은 재산은 상속할 수 있지만 친권, 부양의무 등 인격에 귀속되는 권리·의무는 상속할 수 없다. 김은수 연구원은 “민법에 따라 디지털 유산도 재산적 성격과 인격적 성격으로 구분해 상속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재산적 성격이 명확한 디지털 자료는 상속 여부에 이견이 없다. 저작권법이나 지식재산권법이 적용되는 창작물은 상속이 보장되고 재산 성격이 뚜렷한 암호화폐, 사이버머니 등 가상 자산에 대한 권리도 유족이 승계할 수 있다.

  일부 디지털 유산은 인격적 성격과 재산적 성격을 동시에 띠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계정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이용자 개인에게 전속하는 인격적 유산으로 간주되지만 이용자가 계정을 운영하며 금전 이익을 얻었다면 재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김태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디지털 자료는 종류가 다양해 재산적 가치를 지닌 유산과 인격적 가치를 지닌 유산으로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렇듯 성격이 뒤섞인 디지털 유산을 두고 유족 등 상속인의 권한을 원칙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관점과 제한해야 한다는 관점이 대립한다. 상속인의 권한을 용인하는 측에서는 유산에 재산적 가치가 포함돼 있다는 데 주목한다. 김제완(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산에 포함된 제3자의 개인정보나 고인에 관한 민감한 정보를 보호할 장치는 필요하지만 재산적 가치가 있는 유산에 대해 상속인의 접근권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며 “접근권 보장을 원칙으로 두고 제한은 예외적으로만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연구위원은 “유족이 계정에 대한 권한을 상속 받더라도 사망자의 이름으로 계정을 운영하거나 새로 이용하는 권한까지 상속할 수 없다”며 “계정 이용 권한은 고인이 서비스 회사와 체결한 계약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이미 형성된 데이터를 열람·복사하는 권리만 인정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민법상 인격적 가치를 지녔다면 상속할 수 없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인격적 가치만 지닌 디지털 유산의 상속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태훈 연구위원은 “민법 제1005조에 나오는 재산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고 판례 해석에 의존한다”며 “금전 가치가 없는 유골의 상속을 인정한 최근 대법원 판례에 비춰 보면 경제 가치가 없는 디지털 기록도 상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정한 디지털 정보의 상속 가능성을 일괄로 정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김병필(카이스트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결국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서비스 약관에 사망 시 계정 삭제가 명시돼 있다면 이를 존중해야 한다”며 “법이 일괄로 모든 계정 정보에 유족의 접근권을 보장하면 계약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했다.

 

  “기업 약관에 고인의 뜻 묻힌다”

  전문가들은 이용자가 생전에 디지털 유산 처리 방식을 직접 지정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병필 교수는 “법이 수많은 디지털 자료의 상속 가능성을 일일이 규정하기보다 이용자가 생전에 지정한 방식에 따라 사후에 데이터를 상속 또는 폐기하는 방안이 적절하다”고 했다. 

  이러한 상속 체계를 마련하려면 법률 개정이 확실한 대안이지만 우리나라의 입법 현실을 고려하면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태훈 연구위원은 “미국·프랑스처럼 생전 상속자 지정이나 사전 동의 제도를 법률에 명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면서도 “법 제정이 늦는 만큼 학계의 해석론과 사회적 공론화로 기업 정책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최 교수도 “입법이 궁극적 해결책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입 단계에서 사후 처리 방식을 선택·동의하도록 하는 절차를 약관에 두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구글, 애플 등 해외 기업은 디지털 유산 상속자와 상속할 데이터를 지정하는 정책을 도입했지만 국내 기업은 아직이다. 네이버는 회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일신에 전속한 정보로 보고 유족에게 일괄 제공하지 않는다. 유족이 요청하면 회원 탈퇴 처리와 블로그 게시글 등 일부 공개된 자료의 백업과 열람만 지원한다. 카카오도 계정 정보, 카카오톡 대화 내역, 친구 목록 등 정보를 유족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미사용 모바일 교환권, 남은 캐시·포인트 같은 자산만 유족이 환불받을 수 있다. 

  사후 데이터 처리 방식을 이용자가 정하지 못하면 디지털 유산은 고인이나 유족의 뜻과 무관하게 기업 약관에 따라 처리된다. 오병철(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디지털 유산 상속 범위와 대상을 정할 때 고인이 생전에 행사한 자기결정권이 우선 고려돼야 하지만 기업이 제도를 마련하지 않아 고인의 의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 했다.

  유언 제도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속재산 처분, 혼인 외 출생자 인지 등 일부 사안에 대한 유언만 법적 효력이 있고 장례 방식, 유해 처리 등 고인의 의사가 중요한 사후 사안에 대해서는 유언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김제완 교수는 “유언 제도에 따르면 사망 전 계정 정보, 사진처럼 인격적 성격이 강한 정보의 처리 방식을 유언으로 정해도 고인의 의사가 무시될 수 있다”며 “정보통신망법을 개정해 고인이 생전에 표시한 의사는 존중돼야 한다는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 | 박병성 기자 bspark@

인포그래픽 | 송민경 기자 p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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