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꿈을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울어보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어렸을 때부터 난 우는 법을 몰랐다. 유년기 시절 사진을 봐도 우는 사진은 없다. 연인과의 이별에도, 입대 전 부모님과의 마지막 인사에도, 만취 상태에서 나눈 친구들과의 진솔한 대화에도 내 눈물샘은 파업이다.
눈물샘이 있긴 한 걸까? 어제도 눈물을 흘려보기 위해 맥주와 매운 새우깡에 슬픈 영화를 곁들여봤다. 그리곤 실패했다, 언제나처럼. 우는 것이 예쁜 사람을 절대 놓치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눈물이 없기에 우는 모습이 추해 보일 일은 없어서 다행이란 장점은 있다.
왜일까? 내가 남들만큼 노력하지 않아 본 걸까? 내가 남에게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아서일까? 눈물 부재의 원인을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도 많다. 어떤 상황에서도 느끼는 감정의 역치가 크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즐거움, 분노, 슬픔 등을 느끼는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의 고점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낮은 탓이 분명하다. 한 가까운 친구는 눈물이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 친구는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흘린다. 그런 자신이 스스로 분하고 한심하다곤 한다. 이해는 된다. 하지만 우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처지에서 그저 신기하고 부럽기만 하다.
예능과 드라마를 많이 보지도 않지만 연말이 되면 연예대상과 연기대상 시상식을 꾸준히 챙겨본다. 상을 받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연예인들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기쁨의 눈물이라니? 누군 아무리 슬퍼도 흘리지 못하는 눈물을, 누군 너무 기뻐서 흘리다니. 울기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닌, 감정이 흘러넘쳐 나오는 눈물과 아름다운 수상 소감. 저 눈물이 나오기까지 저들은 얼마나 노력했을까. 얼마나 노력했길래 기쁨이 눈물로 드러나는 것일까.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할까.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어찌도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가. 그럼 다시 한번 말해보겠다. 내게 꿈을 물어본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울어보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싶다.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져 흘러나오는 눈물이 뺨 아래로 흘러내릴 때까지 열심히 살리라 다짐한다.
이지원 기자 easy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