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친구와 얘기하다가 그가 <붉은 추장의 몸값>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너 오 헨리(O. Henry) 단편집 안 읽었어? 소설을 쓴다는 사람이 말이야 오 헨리를 안 읽다니? 나는 당장 줄거리 설명을 시작했다. 시시한 악당 두 명이 아이를 유괴하려고 계획해. 부모에게서 크게 한탕 뜯어내서 손 씻고 싶다는 거였지. 그런데 당연하지만,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거야. 걔네가 유괴한 아이가 정말 말을 안 듣거든…….
물론 오 헨리 소설을 읽지 않아도 소설가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독자 생활에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그의 소설은 문학적으로 깊이가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구성은 단순하고 인물은 전형적이다. 소설 전체가 결말의 마지막 몇 줄을 위해 흘러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의 작품은 단편소설 길이의 농담에 가깝다. 여기에는 꽤 못된 악담도 포함된다. <마지막 잎새>처럼 ‘선량한’ 소설도 심히 아이러니하다.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시피 <마지막 잎새>는 폐렴에 걸린 소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담쟁이의 이파리가 모두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 옆에서 발을 동동거리던 친구는 이웃의 어느 화가 영감에게 고민을 상담한다. 기적적이게도 겨울이 끝나자 그녀는 몸을 회복한다. 담쟁이의 잎새 하나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매달려 있던 덕분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화가 영감이 폐렴으로 숨을 거둔다. 한겨울에 담쟁이를 벽에 그리느라 밖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잎새는 사실 그의 그림이었다. 감동적인 결말이지만 찝찝한 의문이 든다. 그녀의 병은 사실 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화가 영감은 여자애의 우울함을 달래주겠다고 괜히 지나치게 큰 대가를 치른 것일까?
어릴 때 ‘마녀의 빵’을 각색한 만화를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어느 빵집 여자가 가난한 단골손님에게 신경을 쓴다. 궁핍해 보이는 그 남자 손님은 늘 딱딱하게 굳은 싸구려 빵을 구입한다. 여자는 그를 가엾게 여겨, 남자가 구입하는 빵에 몰래 버터를 듬뿍 바른다. 그녀의 배려심을 알아차리면 남자도 분명 감동할 것이다. 어쩌면 로맨틱한 감정이 싹틀지도 모른다. 여자는 기대감을 품고 기다린다. 정작 남자는 그녀가 일을 망쳤다고 펄펄 뛴다. 그는 중요한 건축 설계도를 그리던 중이었고, 묵은 빵을 지우개 대신 사용하고 있었다. 버터가 튀어나오는 순간 그가 몇 달간 그리던 설계도는 완전히 망한다. 그래도 남자는 결국 여자의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각색 만화의 결말이다. 오 헨리는 그렇게 매끈한 결말을 내지 않았다. 남자는 빵집 여자를 마녀라고 매도한다. 여자의 들뜬 기대는 비참하게 박살 난다. 절벽에서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 결말이다.
롤러코스터가 내리꽂히듯 마무리되는 결말, 이것이 오 헨리 소설의 핵심적인 매력이다. 그는 가난하게 자라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소설가로 전향했다. 오 헨리의 소설에는 빈곤하고 시시하고 그리 간단히 행복해지지 못하는 인물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주인공이 되어서도 복잡한 서사를 얻지는 못한다. 대신 아이러니한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경험한다. 인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극적인 순간이 오 헨리 소설의 결말에서는 어김없이 발생한다. 언제나 유쾌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강렬하게 번쩍이는 것이다.
심완선 SF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