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이유로 법학 전공
피난지 부산에서 대학 생활
편집국에서 배운‘불편부당’
“시대정신 포착해 한발 앞서길”
“1970년에 아사히 신문 특파원 출신 기자 한 명을 만난 적 있어요. ‘일본의 여론을 향도한다’는 자부심이 참 대단했죠. 70년 전 고대신보 기자들도 그에 못지 않게 전후 학내외 여론을 이끈다는 긍지를 품고 활동했습니다.”
1954년, 당시 고대신보에 입사한 신근재(법학과 51학번) 동국대 일어일문학과 명예교수는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편집부장을, 이후 두 달 만에 편집국장 업무를 시작해 1년 넘게 본지를 이끌며 대판 4면 증면, 첫 공개 채용 시행 등 체계 마련을 주도했다. 신문 발행 외에도 논문집, 교재 등 출판까지 도맡은 그는 학내 기록자 역할을 자임했다.
광복·전쟁 격변에도 높은 학구열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신 동인은 중학교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공부를 곧잘 했던 그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인 경상남도 거창을 떠나 경상북도 김천으로 향했다. “각 도마다 중학교가 1~2개인 탓에 진학 경쟁이 치열했어요. 중학생이라고 주변에 소개하면 ‘큰 일 할 놈’이라며 대우해 줬죠.” 고등학교 졸업이 다가오자 신 동인은 ‘먹고 살기’ 위해 법학을 택했다. “법학과가 무난했어요.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지만 일반 행정관청이나 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죠. 판검사가 돼 입신양명하는 건 바늘구멍 통과와 같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발발한 전쟁의 혼란은 생활 깊숙이 찾아왔다. “전쟁 초반에는 피난이 잦으니 기존의 질서가 흔들렸어요. 길에 젊은 남자가 보이면 군으로 데려갈 때였죠. 이왕이면 장교가 되자고 고향 친구와 후보생 시험을 쳤는데 저는 도중에 포기했고 친구는 소위가 됐죠.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임관 몇 달 후 인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 동인은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대구 원대동의 임시교사가 아니라 부산 전시연합대학에 다녔다. “전쟁 중이다 보니 소속 학교가 아니더라도 인정 과목만 들으면 학점을 인정해 줬어요. 교수자 수가 적으니 대학 간 겸직도 허용됐죠. 사회나 대학이나 혼란했습니다.” 많은 학생이 피난 신세였지만 학구열은 뜨거웠다. “천막 아래 임시로 도서관이 마련돼 있었는데 고시에 열중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학교 다니다 외무, 행정고시를 통과한 친구도 있었죠.”
체계 갖추기 시작한 ‘고대신보’
본지는 1947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창간했다. 학생이 주도한 만큼 자율성은 높았지만 자금은 부족했고 조직 체계도 엉성했다. 학교 측이 창간호 발행 자금을 지원했지만 이후 매 호수는 발행 자체가 도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주간과 편집국장 업무 중 하나가 교우, 동인을 찾아다니며 기부받는 것이었어요. 휴전 전까지는 선배들 호주머니 털어서 신문을 발행한 셈이죠.” 본지 창간 1주년 기념사도 ‘지나간 1년 동안에 불과 제7호밖에 내지 못한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나 여기에는 재정적 결핍, 역량부족 등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라며 열악함을 기록하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1950년 4월까지 14번의 신문을 발행한 본지는 제14호 발행 이후 6.25 전쟁의 여파로 무기한 휴간에 돌입했다. 대구 원대동 임시 교사에 고려대가 자리 잡자 1952년 2월 4일 제15호 속간호를 발간했다.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무기정간을 겪다 제25호부터는 고대신보로 개칭되기도 했다.
1953년 고려대 서울캠퍼스는 휴전 전후로 미군 제5공군이 머물고 있었다. 유진오 전 총장을 비롯한 학내 구성원은 교사(校舍)의 반환을 촉구했다. 본지에는 1953년 12월 1일 지령 34호 1면에 영문 사설 ‘GIVE US OUR CAMPUS’가 실렸다. “당시 편집국장 등이 교사를 반환받으려고 계동에 있는 중앙고등학교에서 셋방살이하며 찍은 신문을 미국 대사관 등 관련 기관에 찾아가 전달했죠.”
안암동으로 돌아오면서 학교가 재정 기반을 갖추자 신문사 재정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일 년에 두 번 걷히는 등록금에 신문 대금 일정액을 넣은 것이다. “제작비는 물론 취재비, 편집국장 수당도 지급됐죠. 한 달 하숙비 정도였으니 신문 제작에 집중하기 충분했습니다.”
재정 부담이 줄어든 만큼 신문의 발전은 빨라졌다. 1954년 4월 발행한 제38호부터는 타블로이드 4면에서 대판 2면으로, 6개월 후에는 대판 4면으로 증면됐다. 전문기자가 참여하던 대학신문을 빼고는 학보 중 가장 많은 소식을 전한 것이다. “지면이 크게 늘었는데 인원은 10명 남짓 고정이라 고생을 많이 했죠. 권두논문을 1면에 실어도 지면이 많이 남아 주변에 결혼하는 학생 없느냐 수소문할 정도였습니다.”
1954년 2학기가 시작한 9월, 서울캠에서 복학한 신 동인은 출판사에서 일한 경험 덕에 고대신문 입사를 추천받았다. “박우사라는 출판사에서 국어 교과서를 만드는 등 글을 잘 다루는 분한테 훈련받은 덕이었죠.” 들어간 지 한 달만에 편집부장이 된 신 동인은 두 달 후 편집국장 대리로 임명됐고 이후 편집국장에 임명돼 1년 넘게 고대신문을 이끌었다. 일단 인력난을 타개하고자 추천으로 기자를 선발하는 관행을 깨고 공개 채용을 시작했다. “54학번인 정치과 나규오 학생을 처음 뽑아 견습을 하게 했죠. 필력을 갖췄기 때문에 제2부장도 했어요. 주먹구구식 운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신 동인은 지령 78호 발행금지를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꼽는다. 학교 측은 ‘기본재산이 없는 자는 대학교육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김순식 대학원장의 발언에 반박하는 사설을 싣고 정치학회 취재 후 편향된 기사를 썼다는 이유를 들었다. “다들 어렵게 피난 다니다 학교에 왔는데 재산이 없으면 교육도 받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정치학회 취재 건도 학생 반응이 가장 좋은 야당 정치인의 연설 내용을 담았는데 ‘한민당의 성격’ 언급이 화근이었는지 학교 측이 문제 삼았습니다.” 결국 방학특집호 4000부는 전량 폐기됐다.
그가 편집국을 책임지던 당시, 개교 50주년을 맞은 학교 측은 50주년 기념논문집 출판을 본지에 요청했다. “학교 분위기 자체가 들떠 있었어요. 교가, 교표, 교장까지 새로 만들 정도였으니까요. 논문집을 의뢰받아 출판한 후 당시 주한미국대사의 ‘고려대는 적이 없다’는 찬사에 유진오 총장님께서 지은 순박한 미소를 잊을 수 없습니다.” 현장보다 글과 친했던 신 동인은 1955년 12월 12일 지령 93호를 끝으로 고대신문사를 떠났다. 학내 출판 업무에 집중할 계획 때문이었다. “논문집을 냈다는 소식이 퍼지자 물리론집 등 출판 요청이 여럿 들어왔죠. 특히, 교양국어와 교양영어를 국문과, 영문과 교수님과 함께 편집하고 만든 게 기억에 남아요.”
편집국장에서 일본학자로
1961년 9월, 신 동인은 문과대학장이었던 신석호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말 한마디에 일본학자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일본과의 외교 교섭에서 한국이 한 번도 이긴 적 없다’고 하셨어요. 충격도 충격이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죠.” 종합잡지 <정경연구>의 편집장으로 창간호부터 50호까지 발행을 이끌던 그는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도쿄대 객원교수, 동국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활동하다 동국대 일본학연구소장을 지내는 등 평생 일본학을 연구했다.
편집국장에서 학자가 돼 연구에 매진한 그는 언론인과 학자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규정한다. “일간신문은 하루살이, 주간신문은 일주일살이라는 말이 있어요. 학자는 깊이 천착하고 글도 자연스레 길어지는데 언론인은 문장도 짧고 세태를 포착하는 데 능하죠.” 그는 학자가 됐지만 본지 생활 덕에 ‘불편부당’의 원칙을 익혔다. “후배 기자들이 현장을 다녀와서 글을 쓰면 치우칠 수밖에 없어요. 원고를 받고 나서 심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 사건을 접하면 일단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죠.” 어느 시대든 학보사와 청년은 시대 변화를 읽어내야 한다고도 했다. “시대정신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신문 기자라면 한발 앞서 조짐을 포착해야 하죠. 발상의 전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뒤쫓는 역할만 할 겁니다.”
글 | 이태희 편집국장 notkim@
사진 | 임세용 기자 sy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