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주노총은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택배 사회적대화기구에서 택배 노동자의 과로를 막기 위해 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새벽 배송을 제한하자는 주장을 내놨다. 찬반 의견이 대립하는 가운데 고려대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노동자의 삶 개선하는 실질적 방안을 - 박하연(문과대 사회23)

  새벽 배송 금지에 관한 논의는 택배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고자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소비자가 ‘오늘 14시 전 주문 시 내일 7시 내 배송’과 같은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고, 노동자들도 생계와 직결된 일자리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택배 배송 시스템이 기형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루가 멀다하고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쏟아지는 현실에 야간 노동은 분명 많은 부분 영향을 끼쳤다.

  쿠팡이 도입한 ‘로켓배송’ 시스템은 한국 사회의 소비 방식과 물류 산업에 분명 혁신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이제 번거롭게 밖에 나가 장을 보는 대신 플랫폼을 통해 손쉽게 물건을 주문한다. 플랫폼 덕분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편리한 소비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조명은 플랫폼만을 비춘 채 노동자를 그림자로 몰아넣고 있는 실정이다. 소비자들은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가 있고, 노동자들 역시 분명히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국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제한 없이 허용해 주는 존재가 아니다. 안전을 이유로 노동 시간이나 환경을 통제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이미 많은 노동자를 잃었고, 그들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간절한 노동자들이 돈을 벌기를 원한다는 동기가 그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물론 많은 전문가들이 입 모아 말하듯 새벽 배송의 전면 금지는 단순히 노동자들이 다른 업계로 이동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편리한 서비스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력 충원이나 배송 품목 축소와 같은 실질적인 방안이 제시돼야 한다. 사회는 소비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따라가기 벅찬 속도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새벽을 금지하는 사회, 스스로의 시계를 멈추는 문명 - 강주희(보과대 보건정책19)

  “노동은 인간의 본질적 활동이며,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노동은 단지 생계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지속’을 창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노동의 시간을 규제하려 든다. 새벽 배송을 금지하자는 목소리, 그 안에는 피로한 사회의 죄책감이 숨어 있다. 치유를 가장한 합리화는 마치 합당한 책임인 듯 노동을 집요하게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다. 방식을 개선하는 합리적 행위 대신 노동 자체를 삭제하려고 든다. 새벽 배송 금지는 인간다운 노동, 평등이라는 명목의 의도된 선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의도는 보호라는 탈을 쓰고 인간을 비인간화한다. 그리곤 탈을 쓴 늑대의 달콤한 유혹에 인간은 문을 덜컥 열었다. 새벽에 일하기로 선택한 노동자에게 ‘그 시간은 부당하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생존을 도덕으로 재단하는 무언의 폭력을 저지른다. 금지는 보호가 아니라 권리의 박탈인 것이다.

  새벽 배송 금지는 유도된 양심의 연출이다. 새벽을 없애면 좀 더 합리적이고 윤리적이 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허나 편리함을 끊는다고 윤리가 생기진 않는다. 오히려 그 ‘불편의 미학’은 현실의 노동 구조를 가리고, 애써 도달한 지점은 인간의 위선을 만족하게 하는 의식일 뿐이다.

  간접적으로 새벽 배송을 중단하는 것은 단일한 산업의 몰락이 아닌 거대한 생태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물류는 인간의 복잡한 신경망과도 같다. 시냅스의 연결을 끊으면 연결된 정보의 맥락이 무참히 무너진다. 그리고 피해는 자본이 아닌 사람에게, 즉 노동자 자신에게 돌아간다.

  새벽 배송은 인간이 시간을 지배하려는 필연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불을 밝히고, 철로를 깔고, 네트워크를 엮어 우리는 어두웠던 밤을 확장했다. 새벽을 금지하는 것은 문명의 시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행위이다. 

  새벽은 차가움 속에서도 누군가의 꺼져가는 생을 데운다. 마치 촛불 같다. 결국 우리가 금지해야 할 것은 새벽이 아니라, 중립의 탈을 쓴 늑대다. 문명은 어둠 속에서 걸어온 인류의 발자국 위에 세워졌다. 새벽을 멈추는 순간, 진보의 발자국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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