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퇴사 후 만난 융합디자인
독자의 쉬운 이해가 가장 중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 찾아야”
신유진(기계공학과 03학번) 비주얼 저널리스트는 대학에서 이동로봇을 연구하고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자 1년 만에 그만뒀다. 국제앰네스티에서 인턴으로 활동하고 적정기술을 연구하다 유학길에 오른 그는 데이터 시각화와 처음 만났다. 이후 미국 유수 언론사에서 코딩, 디자인 등 다양한 도구로 데이터를 풀어내는 저널리스트가 됐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까 가장 즐거운 일을 찾아야 해요. 그러려면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경험 쌓다 찾은 적성
물리와 수학을 좋아한 신 기자는 자연스레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기구학과 로봇 공학에 흥미를 느낀 그는 대학원에서 자율주행 자동차 개발에 쓰이는 이동로봇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성향이라 제가 만든 로봇이 실생활에 활용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많은 센서 데이터를 활용해 이동로봇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장애물을 판단하는 시뮬레이션을 만들었습니다.”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신 기자는 현대모비스에 입사해 이동로봇의 자동 주차 시스템을 개발했지만 1년 만에 퇴사하기로 했다. “대기업에서 일하며 직장 문화와 잘 안 맞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상사 대신 버튼 누르는 교육을 받으며 답답함을 느꼈죠.” 퇴사 후 도쿄대 로봇공학 박사 과정을 밟으려 했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기로 했다. “기계공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떠올릴 만큼은 아니었어요.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언제 어디서든 자기 일에 몰입하는 사람을 보며 부러워했죠.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지 않으면 일본에서도 같은 고민을 반복할 것 같았어요.”
오로지 적성을 탐색하며 1년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신 기자는 국제앰네스티 마케팅 인턴에 도전했다. “회사는 이윤을 추구하지만 국제앰네스티는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잖아요. 그런 집단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했어요.” 반년 동안 빈곤과 인권침해 문제를 알리던 그는 자원이 부족한 국가의 빈곤 퇴치를 위한 적정기술을 연구했다. “적정기술학회에서 식수 정화 기술을 연구하고 인권과 적정기술의 접점에 관한 논문을 썼어요. 앰네스티에서는 빈곤을 인권 문제로 조명하지만 학회에서는 기술적 해결을 도모하죠. 하나의 문제를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독서를 하며 인생을 돌아보던 신 기자는 책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읽다 융합디자인을 처음 접했다. “디자인팀과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스탠포드 기계공학과 학생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어요. 공학 기술을 활용하는 직장 생활을 하며 디자이너와 협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국내에는 융합디자인을 가르치는 대학이 없어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공동 연구가 활발한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했다. “산학 협력이 활발한 뉴욕대를 선택했어요. 융합디자인 공부에 그치지 않고 미국 회사 입사까지 고려했거든요.”
시뮬레이션으로 재구성한 뉴스
신 기자는 융합디자인 전공 중 데이터 분석 결과를 시각적 이야기로 만드는 수업을 들었다. “데이터 시각화에 사용되는 기술과 스토리텔링을 배우는 수업이었어요. 로봇을 공부하며 데이터 시각화 기초 지식을 쌓은 덕에 재미를 빠르게 느낄 수 있었죠.” 데이터 시각화는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헤맨 여정의 종착지였다. “작업물 하나가 과제로 주어지면 밤새 두세 개 더 만들어 갈 정도로 열중했어요. 데이터를 통계로 분석할 때는 발견하지 못한 사실을 시각화하면 파악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죠.”
뉴욕대 졸업을 앞둔 신 기자는 뉴욕타임스로부터 작업물을 소개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세월호 침몰 사고 뉴스의 시간대별 시청률 변화를 시각화한 그의 작업물을 긍정 평가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웹 코딩을 전문으로 하는 그래픽 기자를 찾고 있었지만 당시 저는 웹 코딩을 주로 이용하지 않아 입사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언론사에서 일하는 비주얼 저널리스트를 목표로 삼는 계기가 됐죠. 언론사에서 일하면 특정 분야가 아닌 다양한 데이터를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신 기자의 바람과 달리 언론사 그래픽 팀에서는 좀처럼 새로운 기자를 뽑지 않았다. 구직을 이어가던 그는 MIT 도시계획연구원에서 데이터 시각화 전문 연구원으로 일했다. “지하수 표본을 분석해 보스턴시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의 확산 양상을 시각화했어요. 이동로봇을 연구한 경험 덕에 지하수를 채취할 로봇까지 직접 개발했죠.” 구직 중에도 경험을 부지런히 쌓은 신 기자는 2015년 월스트리트저널의 비주얼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는 기자와 디자이너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며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기삿거리를 발굴하거나 기자가 취재한 데이터를 분석한 후 시각화 방법을 결정하고 코딩, 디자인, 텍스트 등을 통해 전체 이야기를 완성했다. 신 기자는 기사 내용에 적합한 시각화 방법을 고르는 데 특히 공들였다. “라스베이거스 총기 난사 사건을 보도할 때는 경찰의 무전과 현장 사진을 활용해 총기 난사범을 찾는 과정을 보여줬어요. 자율주행 자동차의 기술적 한계를 다룬 기사에서는 어려운 설명 대신 독자들이 게임으로 운전하도록 도왔죠.”
이 외에도 합법적 이민자 수 변화, 자살 테러 통계 등 일상과 가까운 소재의 데이터를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냈다. 고속도로 Interstate-95의 문제를 시각화한 시뮬레이션 등으로 한국인 최초로 Society for News Design의 Individual Portfolio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가장 크고 이용자가 많은 고속도로인 Interstate-95에서는 교통체증과 사고, 도로포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등 문제가 심각했어요. 사람들이 시뮬레이션 고속도로를 주행하며 문제를 체감하게 했죠.” 그는 독자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작업물을 만든다. “비주얼 저널리즘도 저널리즘이기에 정확성과 신뢰성이 가장 중요해요. 다만 시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만큼 독자의 쉬운 이해를 가장 큰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2018년, 신 기자의 성과를 눈여겨본 워싱턴포스트는 당사 이직을 제안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그래픽 팀이 커지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을 때라 관심이 갔어요. 면접관들이 제 프로젝트를 꼼꼼히 조사하고 질문하는 걸 보며 같이 일하고 싶었죠.” 당시 워싱턴포스트는 브랜드를 대중에게 각인하려 색상, 타이포그래피, 아이콘 등 디자인 요소를 구축하고 있었다. 신 기자는 브랜드 컬러를 정하고 그래픽 제작에 쓰일 컬러 팔레트를 만드는 업무를 맡았다. “독자가 어떤 색을 먼저 인식하는지, 같은 계통의 컬러 사이에 사람들이 구별할 만큼 차이가 있는지 등을 독학했어요. 색으로 다양한 데이터 유형을 구분하고 중요도를 강조하면 독자가 복잡한 정보를 쉽게 해석할 수 있죠.”
돌아온 한국에서도 ‘데이터 시각화’
신 기자는 워싱턴포스트에서 일한 지 4년이 되던 해 한국행을 결심했다. “미국의 수평적인 직장 문화가 제 성격과 잘 맞았지만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미국에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았으니, 나다워질 수 있는 한국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신 기자는 데이터 시각화를 컨설팅하는 스튜디오 비주얼 플롯을 지난해 설립했다. 백범 김구의 독립운동 업적을 디지털화해 전시하는 백범김구기념관의 프로젝트를 컨설팅했다. “<백범일지>에 언급된 사건과 장소의 변화를 어떻게 시각화하고 디자인하면 좋을지 조언했어요. 평소 작업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자문했다면 이 프로젝트에서는 사람들이 전시물에서 이야기를 찾게끔 의도했습니다.”
신 기자는 데이터 시각화 지식을 대중과 공유하고자 ‘데이터를 경험으로 바꾸는 디자인’ 등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고 책도 집필한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데이터 시각화 관련 취업 시장도 좁고 교육도 다양하지 않아요. 어떤 직종이든 데이터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인 만큼 좋은 교육을 제공하려 노력합니다.”
신 기자는 삶의 방향을 잘 모를 때 잠깐 쉬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회사를 그만둘 때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어요. 대기업에서 로봇을 연구하려 석사가 됐는데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두려웠죠. 돌아보면 갖고 있는 걸 내려놓은 덕에 변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 자신의 퇴사 후 1년처럼 좋아하는 걸 찾을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고도 조언한다. “일이나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만 고민하고 경험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그때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글 | 박영민 기자 oldmin@
사진제공 | 신유진 기자
이미지출처 |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