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4·19 혁명의 신호탄이 본교 학생들의 4·18 의거였다면,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 258인의 가두시위는 혁명의 대미를 장식했다. 故 김성식(문과대 사학과) 교수를 비롯한 본교 교수 8인은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는 등 교수시위를 주도했다. 평소 “방관자는 역사의 죄인”이라 강조했던 김성식 교수는 4·18 의거 현장에서 제자들의 피를 보고 교수시위 참여를 결심했다. 그는 1973년 정년퇴임 전까지 본교 초대 교무처장, 한국사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故 김성식 명예교수 추모행사가 지난달 19일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렸다. 1986년 서거한 김 교수의 추모식에는 4.18민주의거기념사업회장인 조인형(사학과 59학번) 교우 등 제자·가족 19명이 참석했다. 양교석(사학과 62학번) 교우는 “선생은 진정한 대학인이자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고 전했다.
‘시대정신’ 강조한 사학과의 뿌리
김성식 명예교수는 1908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일본 규슈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한 그는 1935년 모교인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김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들은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했다.
그는 1946년에 막 신설된 본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사학과 학생들에게 김 교수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양교석 교우는 “옛날에는 공책만 갖고 대충 강의하는 교수가 많았는데, 김 교수님은 늘 강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강의에서 늘 역사가의 올바른 역할을 강조했다. 조인형 교우는 “제자들이 민주주의 역사를 ‘죽은 역사’로 두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는 선도자가 되길 바랐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독일학생운동사>, <항일학생사> 등 학생 운동에 관한 저서들을 남기기도 했다.
‘현실비판’으로 역사가 의무 실천
전쟁이 끝난 1950년대는 사사오입 개헌·진보당 사건 등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횡포가 잇달았다. 김성식 교수는 1958년 2월 본지에 논설 ‘학생과 민족운동’을 실어 대학생의 ‘레지스탕스’ 정신을 고취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안으로, 밖으로 민족의 적을 많이 갖고 있다”며 “20대 학생들은 민족주의자가 돼라”고 강조했다.
1960년 4월 18일 본교 학생들은 ‘4·18 선언문’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학생들이 “3·15부정선거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며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길바닥에 주저앉자 김성식 교수를 포함해 본교 교수 10여 명은 학생들의 안위를 걱정해 국회 앞까지 따라 나왔다.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들이 본교 학생들을 습격해 부상자가 속출하자, 김 교수는 “현실비판은 사가(史家)로서 최대의 임무”라는 본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기로 한다. 이상은(문과대 철학과) 교수의 요청에 응해 교수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4월 24일 본교 교수들은 집회 명칭·성명서 내용·허가 문제를 논의했고, 다음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교수들은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외쳤고 학생과 시민들이 뒤따랐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 이튿날인 26일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4·19 혁명 후에도 불의에 저항했다. 김 교수 등 대학교수단 354명이 ‘한일협정비준반대 선언문’을 발표하며 1965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 협정 체결에도 반대했다. 연이은 정부 비판에 문교부는 그를 ‘정치교수’로 낙인찍었다. 1965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은 “김성식 교수 등 3명에 대해 파면이든 자퇴든 간에 해직만 시킨다면 고려대·연세대에 대한 휴업령을 거두겠다”고 했다. 사유는 한일 협정 반대선언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강연으로 학생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그해 9월 해직됐다.
김 교수는 해직 교수 생활 중 <역사와 현실>, <루터> 등 여러 저서를 남겼다. 1968년 복직 후에도 ‘대학 문제에 관한 간담회’에 참석해 학원 자율성을 침해하는 독소조항 삭제를 주장하는 등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흐트러짐 없었던 인간 김성식
김성식 교수는 개인적 삶에서도 본인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양교석 교우는 “당시 고려대 입시에서 교수 자제에게 가산점을 부여하고 등록금도 면제해 줬다”며 “이 혜택을 누리지 않으려고 두 아들은 연세대로, 딸은 이화여대로 진학시켰다”고 말했다. 김 명예교수의 큰아들이 본교 대학원에 합격한 사실을 알고는 아들을 불러 입학 취소를 종용하기도 했다.
제자들에게 따뜻한 면모도 있었다. 졸업 후 자신을 찾아온 양교석 교우에게 “너 장가 안 가니”라며 중매를 서주기도 했다. 양 교우는 “제자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진심으로 걱정한 것”이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1986년 1월 24일 원고를 집필하던 중 노환으로 별세했다.
조인형 교우 등 사학과 출신 제자들은 김 교수의 장지가 마련된 국립4.19민주묘지에서 2년에 한 번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양교석 교우는 “교수님은 100년에 한 번 뵐 수 있을까 하는 스승”이라며 “고대인들은 불의에 항거한 4월 혁명 정신과 김성식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고 전했다.
글 | 정세연 기자 yonseij@
사진제공 | 김세장, 조인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