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별점: ★★★★☆

한 줄 평: 허울뿐인 평등의 붕괴와 재구성


  세상은 다양한 이분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진보와 보수, 선과 악. 이 같은 이항 대립은 끝없이 나열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구조가 절대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구조나 이념은 드넓은 바다 위에 세운 건물과 같아 언제나 불안정하다. 이데올로기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슬픔의 삼각형>은 불안정한 이분법과 평등을 지향하는 인간 사회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한 인플루언서 커플의 등장으로 막을 연다. 이 커플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누가 돈을 낼지를 두고 다툰다. 남자친구 칼은 평등을 주장하며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화를 낸다. 성 역할이 뿌리박힌 사회에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은 정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복잡한 이론을 벗겨낸 칼의 분노는 의외로 단순하다. 껍질을 벗긴 열분은 온통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여기서 평등은 손해 보기 싫다는 마음의 예쁜 포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2부에서 이 인플루언서 커플은 세계 곳곳에서 모인 부자들과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배 안에서 부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없다. 이곳에서 권력은 곧 부(富)이기에 나이, 외모, 성별, 능력 등의 다른 요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부와 가난의 이분법적 구조는 3부에서 무너진다. 선박에는 카오스가 찾아와 많은 이가 목숨을 잃고 몇 명만 작은 섬에서 생존하게 된다. 이 섬에서 돈은 더 이상 아무 의미를 갖지 않는다. 사냥할 줄 알고 불 피울 줄 아는 사람이 곧 권력자다. 섬에서 권력을 차지하는 사람은 크루즈의 청소부였던 동양인 여성 애비게일이다. 애비게일은 자기 능력을 이용해 잘생긴 모델인 칼과 매춘을 한다. 1부에서 성 역할에 역정 내던 칼은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성을 팔아 음식을 얻는다. 칼이 주장하던 평등은 사실 탐욕이었다는 점이 비로소 드러난다. 

  이는 칼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고급 시계를 애비게일에게 선뜻 내주는 부자들부터 칼에게 지금 상황은 평등하지 않다고 화내는 그의 여자친구 야야까지, 이들은 모두 탐욕스러운 존재다.

  우리라고 다를까? 영화에서 선장은 이런 말을 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괴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체계를 구축한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허울뿐인 평등이 아니다. 자기 내면의 추악성을 마주 보는 것을 시작으로 평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백지우(문과대 영문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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