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문 입사 직후 4·3 취재 시작
4·3 특별법 개정에 기여
“제주 역사 알리려 최선 다할 것”
36년간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에 매달렸다.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의 이야기다. 대학 졸업 이후 제주로 귀향해 감귤밭에서 일손을 돕던 중 우연한 계기로 기자 일에 뛰어들게 됐고, 제주 4·3 취재반에도 합류했다. 김종민 이사장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뛰어든 것은 아니지만, ‘끝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1년간 취재를 하다 보니 10년 몰두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종민 이사장에게 제주 4·3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비극이자, 이를 극복해 낸 제주도민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감귤밭에서 신문사까지
제주에서 태어난 김종민 이사장은 어릴 적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제주에선 먹고 살기 어려울 때라 온 가족이 인천으로 이사를 가서 농사를 지으며 지냈어요. 그 후 부모님께선 감귤 농사를 지으러 제주로 돌아가시고, 저는 인천에 남아서 학교를 마저 다녔죠.”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선친께서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어머니 곁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어머니께서 만류하셨죠. 제주대 편입도 사실상 불가능했고요.” 군 복무를 마친 후 복학한 김종민 이사장은 졸업 후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사학과에서는 필수 과목만 듣고, 농과대가 있던 자연계 캠퍼스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조직배양법과 같은 선진 농법도 공부했어요. 대학씩이나 졸업한 농부라면 선진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기말고사를 마치고 졸업식을 뒤로한 채 낙향했다. 김종민 이사장은 볕이 잘 들어 좋은 감귤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서귀포시(당시 남제주군) 효돈동의 감귤밭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던 1987년 6월, 김 이사장의 친척이 그에게 제주신문 기자 모집 공고를 건넸다. 어머니와 함께 농사짓는 것이 행복했던 김 이사장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친척 어른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짓는 것이 기특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에서 ‘고려대씩이나 나와서 농사나 짓는 걸 보니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거짓말일 테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이 말을 들은 어머니께서도 1년 만이라도 좋으니 기자 생활을 해보라고 권하셨어요. 주변 어른들께서도 성인이 돼서 제주에 내려온 만큼 학연이 없으니, 언론사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한 후 농사를 지어도 늦지 않다고 하셨죠.”
4·3 취재 이후 7500명 유족 만나
1987년 8월 제주신문사에 입사한 김종민 이사장은 덜컥 제주 4·3 사건 취재를 맡게 됐다. “당시는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후 민주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던 때였어요. 신문사 내에서도 제주 4·3 사건을 취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1988년 3월에 4·3 취재반이 만들어지고, 제가 거기에 포함됐습니다.” 그가 취재반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고려대 사학과 졸업 덕이었다.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도 사학과를 나온 덕에 제가 미군 보고서나 한자로 된 일제강점기 자료들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김종민 이사장은 제주 4·3 사건 취재를 ‘맨땅에 헤딩’이라고 말한다. “사학과 재학 중에도 현대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역사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독재 정권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 현대사 연구를 금기시했죠. 그나마 정치외교학과 박명림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 ‘제주도 4.3 민중항쟁에 관한 연구’가 취재의 길잡이가 됐습니다.”
취재를 시작한 김 위원장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다. “‘현실을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故 김준엽 전 총장님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특정 역사관에 경도되지 않는 것은 언론인이자 사학도로서의 기본이라 생각했어요. 진실의 밑바닥을 파악하기 위해 미군 보고서를 샅샅이 읽었습니다. 취재를 맡은 후부터는 무서운 것도 없어졌습니다. 만약 잘못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역사의 훈장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러나 누구도 제주 4·3 사건에 대해 쉽사리 입을 떼지 않았다. 1960~70년대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은 판매가 금지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을 언급하면 연좌제로 곤욕을 치르는 시기를 겪었다 보니 다들 말하기를 꺼리셨습니다. 처음엔 마을에 좋은 일을 취재하러 온 기자인 줄 알고 반기시다가, 제주 4·3 사건을 취재하러 왔다고 말씀드리면 신발을 벗지도 못하게 하셨어요.” 그러나 김종민 위원장은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처음에는 문을 열어주지 않던 주민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김 위원장과 대화를 나눴다. “이야기를 끝내신 후에 ‘말하고 나니 마음속 묵은 게 내려간다’고 말씀해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말 많았죠. 취재를 떠나서 경청해 드리는 것만으로 이분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김종민 이사장은 지금까지 7500명의 유족과 희생자를 인터뷰했다.
희생자·유족 보상 위해 노력
1990년 1월 김종민 이사장은 언론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 해직됐다. “해직 기자 동료들과 모금해 제민일보를 창설하고 1990년 6월부터 다시 4·3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취재가 이어지며 진상규명에 대한 여론이 생기고, 결국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까지 제정됐죠.”
그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된 후 미군 보고서와 국가기록원 자료 등을 입수해 진상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가 완성된 후 보름이 지난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해 제주 4·3 사건을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이라 규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끌어냈지만, 김종민 이사장은 제주 4·3 사건 관련 보고서를 진상규명위원회에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보고서도 다 작성했겠다, 신문사에서도 빨리 복귀하라고 했어요. 그러나 희생자 신청과 인정 과정이 발목을 잡았죠. 북촌리 학살 사건에서 사망한 분들은 희생자로 인정이 됐지만,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된 이들을 희생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이 나왔어요.” 김 이사장은 당시 군사재판의 부당함을 논증하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해 진상규명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나중에는 사형 선고를 받고 돌아가신 분들도 희생자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 김종민 이사장은 희생자 명단을 바꾸라는 요구를 듣거나, 소송을 당하는 등 여러 압박을 받았다. “희생자 인정을 위해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소송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제가 변호사를 도와 소송 수행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때 제 신상이 외부에 노출됐어요. 재판 때는 사람들이 해병대 전우회 옷을 입고 단체로 참석하기도 했고, 북파공작원 옷을 입고 와서 ‘저놈이 보고서를 쓴 원흉이다’라면서 비난하기도 했어요. 한마디로 찍힌 거였죠.” 김 이사장을 전문위원에서 해임하라는 민원이 정부 각처에 들어왔고, 결국 2013년 6월 김종민 이사장은 다시 농부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론 10년 동안 물려받은 감귤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주경야독했죠.”
그러나 4·3 희생자를 위한 싸움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제주 4·3 군사재판 재심 청구에 나서 증언하며, 공소기각 결정을 얻어내기도 했다. “농사를 짓던 어느 날 임재성 변호사가 희생자 18명이 신청한 군사재판 재심 청구에 증인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재판 출석이 썩 내키진 않았지만, 군사재판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설명하기 위해 출석했죠. 판사가 공부하려는 자세로 자세히 설명을 듣더라고요.”
2022년 4·3특별법 개정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개정을 통해 희생자 외에도 검찰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됐다. “제가 신문을 통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국가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만큼 배상해야 한다’, ‘당시 진행된 엉터리 군사재판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요구한 덕이었죠.” 김종민 이사장은 과거 출생 신고가 늦게 이뤄지거나, 호적에 제대로 등록돼 있지 않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유족을 위해 여전히 애쓰고 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한테도 호적 등재가 잘못된 사례를 정정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편지를 썼어요. 법원행정처가 제 요청을 받아들이며 현재 호적 정정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제주 에너지 느낄 평화공원 조성할 것”
지난 3월 제주4·3평화재단의 첫 상근이사장으로 임명된 김종민 이사장은 진상 규명과 세대 전승을 과제로 꼽았다. “끊임없는 진상 규명으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게 제 첫 번째 임무입니다. 두 번째는 4·3에 관한 기억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거예요. 5·18 민주화운동은 왜곡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4·3은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그는 한강 작가가 지난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것 역시 4·3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수상 소식 이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함께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제주 4·3 사건을 전국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람들에게 4·3이 뭔지 궁금증을 갖게 만든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제주4·3평화기념관 방문객도 늘었습니다.”
김종민 이사장은 재임 동안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바꾸고 싶다고 밝혔다. “제주 4·3평화공원을 무겁고 슬픈 공간이 아닌 편안하고 안온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유족들과 피해자들은 비참한 역사가 만들어낸 환경에서도 끝내 살아남아서 아름다운 제주 공동체를 복원시켰어요. 비극의 역사를 극복해 낸 제주도민의 자긍심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전시실과 공원도 잘 가꾸고, 콘텐츠도 만들어 가고 싶어요.”
글|김선우 기자 thesun@
사진|임찬식 기자 coldish@
사진제공|김기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