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 반 타의 반 계속한 야구

악역으로 강렬한 인상 남겨

“다양한 경험으로 적성 찾아야”

 

먼 길을 돌아 천직을 찾은 김기무 배우는 “삶은 자기 의지대로 달라진다”고 말했다.
먼 길을 돌아 천직을 찾은 김기무 배우는 “삶은 자기 의지대로 달라진다”고 말했다.

 

  김기무(체육교육과 97학번) 배우는 프로야구 선수 출신 배우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야구 선수가 됐던 김 배우는 꿈을 이루기 위해 29살에 다시 대학에 들어가 생활고 속에 막노동까지 했다. 올해로 17년 차 배우인 그는 여전히 배우를 천직으로 여긴다. “선수에서 배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어요. 대단한 스타는 아니지만 새로운 배역을 탐구하고 인물에 몰입할 때 언제나 행복합니다.”

 

  동네 야구에서 프로 입단까지

  김기무 배우는 초등학교 시절 동네 리틀야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동네 친구들이 야구 유니폼을 입고 경기하는 게 멋져 보였어요. 유니폼을 입어 보려 시작했다가 흥미를 느꼈죠.” 야구에 두각을 보인 김 배우는 만 16세 이하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돼 1994년 포니야구 월드시리즈 콜트리그에서 아시아 최초로 우승했다. “당시엔 야구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었어요. 성적에 대한 부담도 없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서 즐겁게 훈련했죠.”

  고등학생이 된 김기무 배우는 프로 선수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 입시를 준비했지만 성적 부담 탓에 이전처럼 야구를 즐기지 못했다.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바로 프로 구단에 입단하는 선수가 많지만 그때는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면 명문대에 진학해야 했어요. 승부욕이 없는 성격이라 입시 경쟁을 견디기 힘들었죠.” 폭행이 대수롭지 않은 체육계 악습도 그를 괴롭혔다. “운동부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휘두르는 폭행이 관습처럼 내려와요. 경기에서 지면 감독님이 주장인 저를 때리고 나서 후배들을 때리라고 방망이를 주고 가셨죠. 나쁜 관습에 가담하는 스스로가 무척 싫었어요.” 

  경쟁과 폭력에 지친 김 배우는 야구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제가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을 당신의 꿈처럼 생각하셨어요. 제 훈련 일정이 곧 당신의 일정이었고 당신 건강보다 제 건강이나 성적이 먼저였죠.” 야구 외길 인생을 걷는 동안 김기무 배우는 진정한 관심사를 숨겨야 했다. “영화사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영화를 보며 자랐어요. 야구를 그만두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고등학교 3학년 때 몰래 서울예술대에 원서를 쓰려다 아버지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뺨을 맞았죠.” 

  1997년, 한화 이글스로부터 지명받은 김기무 배우는 입단 대신 부모님의 바람대로 고려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 중에도 마음을 다잡긴 힘들었다. “야구에 애정이 없는데 계속하려다 보니 훈련에 집중하기 힘들었어요. 경기보다 미팅에 나가는 걸 더 좋아했죠.” 대학 선수들에겐 꿈의 무대인 고연전도 그에게는 힘들었던 기억일 뿐이다. “고연전의 명성이 대단하다 보니 이겨야 한다는 압박이 엄청났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유격수였지만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외야수, 포수까지 해야 했죠. 졸업하면 어차피 야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모든 포지션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4학년 때는 투수를 맡기도 했습니다.”

  투수로 나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2001년 한화 이글스는 또다시 그를 영입했다. 오래 선수 생활을 하길 원했던 아버지를 위해 김기무 선수는 야구를 그만두지 못하고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팀에는 미안하지만 입단할 때부터 야구에 열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성적 욕심 없이 경기에 임하다 보니 어린 시절처럼 야구가 재밌어졌죠.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선수로 오래 뛰긴 힘들었지만 현재에 집중하려 했어요.”

  즐거웠던 프로 생활도 김 배우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2003년, 김 배우는 한화 이글스에서 방출된 뒤 SK 와이번스의 영입을 거절하며 20여 년 함께한 야구와 작별했다. “오래전부터 마음이 떠나서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스카우터실 문을 세게 닫으며 나갔는데 집 가는 길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미우나 고우나 야구가 제 삶의 대부분을 함께했으니까요.” 그는 야구 선수 생활을 돌아보며 선수로서 자질이 부족했다고 평한다. “고등학교 땐 4번 타자였고 대학교 땐 여러 포지션을 맡았지만 정작 경쟁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야구 선수를 계속하진 않겠지만 더 열심히 할걸 그랬나 하는 후회는 남아요.”

 

  인생 2막, 배우 김기무

  야구장을 떠난 그는 새출발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입대를 선택했다. “군대에서 만난 영화감독 지망생 후임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나눴어요. 오래전부터 영화감독을 동경했다고 말하니 감독보다 배우를 잘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꼭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막연히 영화가 좋아 감독이 되고 싶었던 거라 배우를 하기로 결심했죠.” 목표가 생긴 김기무 배우는 발성과 연기를 연습하며 복무 중에도 입시 준비에 매진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교양도 쌓을 겸 책을 많이 읽었어요. 독후감을 쓰면서 인물의 감정을 분석하고 대학 입시에 쓰이는 대사를 구해 연기 연습도 했죠.” 

  2006년, 그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에 학사편입했지만 별다른 경제적 기반 없이 대학 생활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토요일엔 새벽부터 저녁까지 인력사무소에서 막노동을 했어요.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모텔방에서 같이 살았죠.” 김기무 배우는 생활고를 겪는 만큼 간절하게 공부했다. “에세이 과제가 있으면 10장씩 써갔고 대본이 나오면 대사를 전부 외웠어요. 성적을 잘 받은 덕에 4년 내내 장학금으로 학비를 댔죠. 연습 시간만큼은 1등을 하다 보니 기본기가 많이 늘었습니다.” 김 배우는 이순재 배우를 보며 사랑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도 배웠다. “이순재 선생님 수업을 들었을 때 우연히 본 선생님 대본이 새까맣고 너덜너덜하더라고요. 진정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의 대본은 저런 모양이구나 깨달았어요. 그 이후론 대본을 숙지하고 인물을 분석할 때 더 진지하게 임했죠.”

  대학에서 기본기를 쌓은 김기무 배우는 2008년 연극 <눈섬의 노래>로 데뷔했다. “첫 공연이라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긴장했어요. 패닉 상태라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나지도 않아요.” 연극배우가 되고도 생활고는 나아지지 않았지만 동료와 도움을 주고받으며 꾸준히 활동했다. “운영하던 회사가 망해 엄청난 빚을 떠안고 있던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와 방을 함께 썼어요. 둘 다 밑바닥 인생이었지만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상황이 나아지면서 엄 대표가 뮤지컬을 기획하면 저는 배우로 참여해 경력을 쌓았죠.” 그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배우 활동을 이어가며 확신을 가졌다. “삶이 내 의지대로 달라질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이것저것 따지기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고민만 했더니 앞으로 나아가고 있더라고요. 이 깨달음 덕에 오랜 무명 생활을 견뎠죠.”

  연기력을 인정받은 건 배우가 된 지 6년 만인 2014년이었다. 김기무 배우는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외투>와 <광인일기>를 현대 서울을 배경으로 각색한 연극 <나우 고골리>에서 자폐인 공무원 아카키를 연기했다. “장애인 연기다 보니 선입견에 갇히지 않도록 하는 데 가장 신경 썼어요. 거동의 한계를 표현하면서도 대사로 아카키만의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이 작품으로 서울연극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성실하고 친절한 ‘악역 전문 배우’

  영화배우라는 오랜 꿈을 향해 나아갔지만, 그가 영화에 캐스팅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결혼하고 가정이 생겨서 오디션 하나하나가 절실한 와중에 계속 떨어지니 힘들었습니다. 오디션에서 눈에 띌 방법을 고민하다 제 강점인 목소리를 부각하는 연기를 만들었어요. 영화 <황제를 위하여> 오디션장 밖에서 목소리만 듣던 박상준 감독님이 얼굴이 궁금하다며 직접 보시고 캐스팅하셨죠.” 짧은 등장에도 ‘신 스틸러’가 된 김 배우는 이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꾸준히 출연하며 악역 전문 배우로 거듭났다. “세보니 전과 15범쯤 될 정도로 악역을 많이 맡았어요. 착한 역할도 많이 맡았는데 알려지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기억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기무 배우는 2019년 방영한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구단 정보를 몰래 빼돌리는 스카우트팀 차장 장우석을 연기했다. “야구 선수와 프런트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였기에 감독님이 촬영 중에 자주 조언을 구하셨어요. 장우석이 절대 악에서 입체적인 인물로 바뀐 것도 제 조언 때문이죠. 1선발 투수 강두기 역을 맡은 하도권 배우에게 투구 자세를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운동선수 경험은 간접적으로도 빛을 발했다. “늦게까지 촬영하는 일이 많고 몸을 쓰는 경우도 잦다 보니 체력이 정말 중요해요. 야구할 때 새벽 1~2시까지 훈련해서 그런지 밤샘 촬영에도 잘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김기무 배우는 선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훌륭한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싶다. “야구 선수 경험이 자양분이 된 건 사실이지만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는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어떤 일이든 친절하고 성실한 태도로 임하면 빛을 발할 날이 올 거라 강조한다. “선수 시절 폭력적인 체육계 문화를 겪고 부채 의식을 가졌어요. 다시 대학에 가고 모텔에 살며 막노동을 할 때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죠. 동시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주변에서 많이 챙겨주더라고요. 주변의 도움 덕에 배우 김기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수에서 배우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만큼 김기무 배우는 운동을 그만두고 방황하는 후배들에게 많은 연락을 받는다. “아직 젊으니까 운동만 바라보지 말고 여행을 다니거나 대학에서 공부하며 진짜 적성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운동을 그만둔 후배뿐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되는 조언이에요.” 그는 가능한 한 오래 무대 위와 카메라 앞에서 관객과 만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배우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김기무가 불리면 좋겠어요. 먼 길을 돌아 천직을 찾은 만큼 오래도록 즐기고 싶습니다.”

 

글 | 정송은 기자 song@

사진 | 서리나 기자 suh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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