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부터 연극문학에 흥미
노르웨이 왕실 훈장 수상
“작가의 꿈 포기하지 않아”
연극학 교수, *드라마투르그, 연출가, 노르웨이어·독일어 번역가. 김미혜(한양대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의 지난 40여년을 요약하는 이력이다. 유럽 연극을 가르치다 10년 전 퇴임한 김미혜 명예교수는 지금도 극장을 찾아 연극 제작진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전작을 번역해 노르웨이 왕실 훈장까지 받았지만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 “교수직에서 퇴임한 후 외국어를 배우고 입센 전작을 번역했듯 도전에 늦은 시기란 없어요.”
인생 목표가 된 글쓰기
김 명예교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여성국극을 보고 연극 배우를 꿈꿨다. “남성 배역까지 소화하는 여자 소리꾼의 모습과 화려한 연출에 매료됐어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좋아하니 연기가 적성에 맞을 거라 판단했죠.” 무대에 서고 싶단 꿈이 생겼지만 한국의 두 번째 여성 법관이 돼야 한다는 부모님 기대에 꿈을 접어야 했다. “엄격하신 부모님의 강한 의지에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서울대 법대 진학을 목표로 과외를 받았어요. 차마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씀드리진 못했죠.”
원하지 않은 과외였지만 자연스레 영어를 익힌 김 명예교수는 영문학 작품을 읽으며 문학의 매력에 빠졌다. “오 헨리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특히 좋아했어요. 소설을 읽다 보니 법전은 도저히 못 읽겠단 확신이 들었죠. 결국 원서 쓰기 직전에 펑펑 울면서 부모님께 영문과에 가고 싶다고 애원했습니다.”
1966년 고려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김 명예교수는 사전 없이 영문 도서 읽는 법을 익혔다. 영시 등 영문학을 많이 읽고 암송하는 방식이었다. “영문학으로 영어를 익힌 덕에 연극학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번역가로 활동할 수 있었어요. <부조리극>, <미국의 아방가르드 연극> 등 여러 영미 외서 번역도 그 덕이죠.”
김 명예교수는 수필과 소설을 고대신문에 기고하며 작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입학 소감 글을 기고했는데 제가 글을 잘 쓴다며 계속 청탁이 들어왔어요. 편집국장이던 오탁번 선배가 특채로 뽑아 주겠다며 강하게 권유해 수습기자가 됐죠.” 기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주제의 글을 쓴 덕에 작문 능력을 기를 수 있었지만 성적이 떨어지자 아버지의 반대로 신문사를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께서 신문사에서 나오라고 아주 강하게 경고하셨어요. 막상 글을 안 쓰니까 갈증이 생겼고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을 출품하는 등 작가의 꿈을 이루려 노력했죠.”
대학 졸업 후에도 글을 계속 쓰고 싶었던 김 명예교수는 야간 교사로 일하며 낮에는 집필에 집중하려 했지만 학교의 행정 처리 문제로 교사 자격증을 받지 못했다. “계획이 틀어져 우울하게 지내던 와중에 어머니께서 저 몰래 무역회사에 서류를 내셨죠. 원하진 않았지만 붙은 김에 열심히 일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 김 명예교수는 조직의 이익보다 가치관 실현을 중시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같이 입사한 남자 직원의 임금이 더 높고 열심히 작성한 보고서가 지적받자 사표를 여러 번 냈어요. 상사의 설득에 가까스로 철회했지만 세무감사를 위해 이중장부를 만드는 건 못 견디겠더라고요. 정의롭지 못한 일을 참고 할 순 없었습니다.”
언어 장벽 넘어 연극 공부
회사에 다니는 동안 교사 자격증이 나온 덕에 김 명예교수는 퇴사 후 마포고등학교에서 야간 교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썼다. 원하던 글쓰기를 할 수 있었지만 성과가 없자 고민에 빠졌다. “문학을 좋아하고 글을 잘 쓴다는 칭찬에 작가를 꿈꿨지만 신춘문예에서 떨어지니 자질 부족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교사인 남편과 만나 가정이 생긴 터라 일은 물론 원하는 공부를 할지도 망설였죠.” 고민하던 찰나 배우자의 오스트리아 유학 결정에 김 명예교수는 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1979년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김 명예교수는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독일어권엔 연극으로 유명한 대학이 많아요. 현실이 아닌 가상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물론 연극도 좋아했기 때문에 독일어가 늘자 연극을 깊이 공부하고픈 욕심이 생겼죠.” 그는 빈 대학원 입학을 위한 독일어 시험에 대비하려 난도 높은 강의를 듣기로 했다. “강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장 어려운 수업을 듣는다며 매일 망신을 줬어요. 자존심이 너무 상해 잠을 4시간씩 자며 공부했죠.” 노력을 기울인 끝에 2등으로 시험에 합격했지만 대학원 수업의 벽은 높았다. “독일어를 그렇게 공부했는데도 강의 내용이 잘 안 들려서 동기들의 책을 빌리며 공부했어요. 3년이 지나서야 스스로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죠.”
김 명예교수는 첫째 딸을 돌보면서 학업을 이어갔지만 둘째 딸 출산 후 산후우울증을 겪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둘째를 임신해서 심리적으로 힘들었어요. 임신 소식을 알고 나서 사흘 동안 울었죠. 출산 직후엔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아 소설만 썼습니다.” 이 시기 창작한 소설을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배송되는 유일한 신문이던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출품하기도 했다. 두 딸을 키우며 이어가는 공부는 고난이었지만 좋은 성적 덕에 장학금을 받아 7년 반 만에 연극학 박사가 될 수 있었다.
입센 희곡과 함께한 15년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한 김 명예교수는 구직에 어려움을 겪다 연세대에서 비교문학을 연구하던 실비아 브래젤(Sylvia Bräsel) 교수의 제안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황동규 시인의 연작시 <풍장>을 브래젤 교수와 함께 독일어로 번역했어요. 한국어에는 ‘누리끼리하다’, ‘노랗다’처럼 색깔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많은데 독일어에는 하나밖에 없어요. ‘직감’ 개념도 서구 문화에 없어 번역할 때마다 고민이 깊었죠. 앞뒤 맥락에 따라 적절하게 시어를 바꾸며 해결했습니다.” 김 명예교수는 세심한 번역을 추구했고 제4회 대산문학상 번역상을 받았다. 독일어 번역으로는 최초 수상이었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임용된 김 명예교수는 유럽 연극사와 대본 분석을 가르쳤다. “논문 단어 하나까지 철저히 지도해서 빨간 펜 선생이란 별명을 얻었죠. 세세히 지적하면서도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매 학기 말 뒤풀이를 하며 학생들과 친해졌어요.” 퇴임을 1년 앞둔 시기, 미국 연극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아지자 미국 연극을 직접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한국에 개설된 연극 강의 대다수는 유럽 연극을 다뤘어요. 미국 연극을 가르치고 싶어도 유럽 연극만 알다 보니 앎의 부족을 느껴 미국행을 결심했죠.”
미국 내 지역 극단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김 명예교수는 동부의 시카고에서 서부의 시애틀까지 지역극장 토니상(Regional Theatre Tony Award)을 받은 극장을 답사했다. “연극 상연이 수도권에 집중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지역 극단도 활발하더라고요. 지역 극단 단원들도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한국 연극계도 지역 균형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봤습니다.” 3년 동안 조사와 연구를 마친 그는 미국 연극 강의 교재인 <브로드웨이를 넘어>를 출간했다.
1999년, 연극 <파우스트>의 김광림 연출가가 김 명예교수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독일어와 문학을 모두 공부한 덕에 국내 최초 드라마투르그가 될 수 있었죠. 연출진이 괴테의 <파우스트>를 깊이 해석하도록 도왔고 리허설 때마다 배우들이 문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이해하도록 조언했죠.” 드라마투르그 경험은 연극 <해변의 카프카> 연출에 큰 도움이 됐다. “청년 카프카의 여정을 담은 소설을 번역해 연극으로 연출했어요. 연출가들과 함께 작품의 레퍼토리를 고민하다 보니 연극 제작 구조를 깊이 이해해 연출에 큰 도움이 됐죠.”
자타공인 연극 전문가가 된 김 명예교수는 2006년 한국연극학회장 자격으로 베를린에서 열린 입센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입센은 셰익스피어나 체호프 못지않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작가인데 한국 연극에선 거의 다루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소개할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 입센 연구를 시작했죠.” 입센 작품의 영어 번역본과 독일어 번역본을 구해 연구를 시작했지만 노르웨이어를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원서를 읽지 않으면 입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막상 60대에 외국어를 공부하려니까 단어가 외워지지 않아 힘들었지만 사전과 작품을 번갈아 읽으며 번역에 매진했습니다.” 노르웨이어 입문 15년 만에 입센 희곡 전집을 번역한 그는 노르웨이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덕에 2023년 노르웨이 왕실 훈장을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김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한국에서 상연되지 못했던 희곡 <왕위 주장자들>, <헤다 가블레르>, <사회의 기둥들> 등 입센의 대표작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올해 연극 <헤다 가블러>의 자문을 맡아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사고방식과 감정이 복잡해서 연기하기 어려워요. 연출가와만 소통하지 않고 제가 직접 배우들에게 작품을 가르쳤죠.” 주인공 헤다는 한양대 교수 시절 제자인 배우 이영애 씨가 연기했다.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선 드라마나 영화만 촬영하지 말고 연극 무대에도 서야 한다고 여러 번 조언했어요. 평론가와 관객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아 제가 칭찬받은 듯 행복했습니다.”
번역과 연극 자문을 병행하는 김 명예교수는 2010년 펴낸 <모던 연구의 초석, 헨리크 입센>의 개정판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영어와 독일어 번역에 기반한 책이라 오류가 많아요. 원작을 반영해 오류를 고치고 학생들이 쉽게 읽도록 수정하려 합니다.” 개정을 마치면 작가라는 오랜 꿈에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연극으로는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작가로는 아직이죠. 여전히 작가의 꿈을 꾸는 만큼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 자전적 이야기를 쓰려 합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청년들에겐 자신부터 존중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을 존중하려면 건강을 챙기고 정직하게 행동하길 바라요. 그래야 청년들은 꿈을 찾고 세상엔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올 수 있죠.”
*드라마투르그: 연출자와 함께 작품을 해석하고 각색하며 연출에 조언을 제공하는 전문 인력.
글 | 김율리 기자 julius@
사진 | 배은준 기자 agba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