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경기가 끝났다. 연장전까지 갔지만 결국 졌다. 마지막 이닝이 끝나자, 관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빨리,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조금만 늦으면 버스 정류장엔 인파가 차고 넘칠 것이다. 결단을 내렸다. 조금 걷더라도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겠노라!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눈치 싸움에 성공한 이들은 이내 좌석을 차지했다. 빈 좌석 없이 도착한 버스가 경기장 근처 정류장에 멈췄다.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달려들었다. 짜증 났다. 버스가 마치 내 방주라도 되는 것 마냥, 사람들을 태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서 사고가 났다. 계속 탄 냄새가 나더니 결국 엔진에 이상이 생겼다. 버스를 갓길에 세우자 승객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사는 다음 차량이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실내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얼마 후 도착한 후속 버스엔 좌석이 4개뿐이었다. 이번에도 눈치 빠르게, 버스 밖에서 서성거리던 4명이 먼저 탈출했다.
눈치 싸움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신나 하며 버스에 올랐더니 웬걸. 미리 타고 있던 승객들이 우리를 피난민 보듯 보는 게 아닌가. 아니, 버스가 고장이 나서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자기들 이동 시간 조금 늦어진다고 저렇게 차갑게 쳐다볼 일인가? 버스가 마치 자기 방주라도 되는 것 마냥 구는 게 어이없었다.
“버스는 승객의 것!!”
돌아오는 버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얼마 전 봤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겹쳐 보였다. 영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으로 생존자들이 몰리는 이야기를 다룬다. 어제만 해도 나는 야구장을 지나는 ‘황궁버스’에 올라타 있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울타리 밖에서 버스에 태워달라고 달려드는 좀비 떼가 되어버렸다.
작은 유토피아를 갖고, 또 하루 만에 잃어보니 알겠다. 지금 내 모습이 꽤나 별로라는 걸. 사람들은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만든다. 내 공간을 위협하는 타인은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그러다 공간이 무너져버리면, 다시금 누군가의 안전한 공간으로 들어가길 원한다.
조금 더 인간답게 살아야겠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위기의 순간에도 전혀 모르는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용기와 아량 덕분이다. 우리는 이를 ‘존엄성’이라 부른다. 개인의 안전을 내세워 타인을 배척하고, 이를 정당한 명분으로 삼기 시작하는 사회는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니.
<마이구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