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상품으로 유도한 뒤 쇼핑 강제
“단속만이 능사는 아니야”
데일리케이션으로 다변화 필요
한류의 영향으로 2012년 외국인 관광객 1000만 시대를 돌파한 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에는 무려 약 1750만 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부터는 1673만 명을 기록하며 코로나19로 잃었던 활기를 다시 회복하는 추세다. 그러나 늘어난 외국인 관광객을 노리는 덤핑 관광이 국내 관광 산업의 건전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관광 경찰제를 통한 현장 단속 강화 등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란수(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쇼핑 중심의 획일적인 일정에서 벗어나 관광 방식 자체를 다양화하려는 시도로 데일리케이션이 주목받고 있다”며 “덤핑 구조 개선과 더불어 관광의 질적 전환도 함께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한국 체면 깎는 덤핑 관광
덤핑 관광은 저가 패키지로 관광객을 유인한 뒤 쇼핑센터 방문을 강제해 수익을 내는 상품이다. 날씨나 동선을 이유로 예정된 투어를 취소하거나 무자격 가이드를 고용해 돈을 아끼기도 한다. 한국 사정에 어두운 관광객은 바가지요금, 부실한 일정, 강제 소비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3월 서울특별시가 중국 4대 온라인플랫폼에서 판매하는 3097개 서울 여행 상품 중 가격이 낮은 순서대로 상품 100개를 골라 조사한 결과 덤핑 의심 상품은 85개였다.
덤핑 관광 운영 여행사는 주로 관광 상품 자체보다는 쇼핑센터와의 결탁을 통해 수익을 낸다. 박상현(한양사이버대 항공운항·관광항공서비스학과) 교수는 “저렴한 상품을 선호하는 관광객을 유인하는 게 덤핑 상품의 주목적”이라며 “여행사는 재정상 마이너스가 될 정도라도 최대한 저렴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관광객의 소비를 유도해 제휴 상점으로부터 통상적으로 10~20%의 수수료를 받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여행 경비 대부분을 쇼핑센터 방문과 당일 관광 옵션 추가에 쓰느라 정작 문화유산이나 지역 명소 탐방은 부실하게 진행되기도 한다. 김형곤(세종대 호텔관광경영학과) 교수는 “덤핑 상품은 단기적 이익에 집중하기에 품질 관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관광진흥법 제38조에 따르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 안내는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을 취득한 자만 가능하지만 여행사들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무자격 가이드를 고용하기도 한다. 무자격 가이드를 이용하면 일일 비용을 10~15만 원 정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자격 가이드는 고정된 임금을 지급받는 대신 쇼핑 수수료를 인센티브로 받기에 관광객의 쇼핑을 적극 유도한다. 법의 허점을 피하고자 쇼핑 유도 실적이 좋은 불법 가이드를 고용한 뒤, 단속에 대비해 시팅(sitting) 가이드를 마련하기도 한다. 시팅 가이드는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을 취득했음에도 실제로 관광 업무를 하지 않고 단속에 대비해 버스에 앉아만 있다. 앉아서 쉬기만 하는데도 쇼핑 수수료에 따른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유자격 가이드의 협조를 유도하는 것이다. 박상현 교수는 “무자격 가이드는 불법이기에 당연히 퇴출당해야 한다”며 “자격증이 있으면서 시팅 행위를 하는 가이드 또한 반드시 근절돼야 한다”고 전했다.
불량 관광 상품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 두 번째 방문한 천샤오진(陈小金, 여·47) 씨는 “처음 간 저렴한 패키지 투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번엔 개인 여행으로 왔다”며 “저가 상품이어서 신청했는데 쇼핑 일정이 너무 많았고 지속해서 쇼핑을 유도해서 한국 여행에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다니엘 러우(Daniel Law, 남·30) 씨는 “갑작스러운 투어 취소나 쇼핑 유도를 겪으면 ‘돈과 시간을 내서 한국 여행을 왔는데 왜 이러나’ 싶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고 전했다. 박상현 교수는 “옵션 투어나 쇼핑센터 방문 자체는 크게 문제가 아니지만 문제는 그걸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에서 관광객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라 지적했다.
덤핑 관광은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 상인에게도 피해를 안긴다. 명동 길거리에서 캐릭터 양말과 한국 티셔츠를 판매하는 장재호(남·71) 씨는 “여행사와 계약해서 관광객을 끌어가는 상점들이 있다”며 “판매하는 상품 대부분이 BTS 캐릭터 양말이나 KOREA 티셔츠처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건데, 계약된 상점들이 관광객들을 끌어가면 안 그래도 잘 안되는 장사가 더 힘들어진다”고 토로했다. 소규모 한국 기념품점을 운영하는 정명수(남·56) 씨는 “여행사와 계약한 상점에서 한번 돈을 쓰고 나면 다른 곳에서 지출을 줄이려 하니 상점 운영이 잘 안된다”고 전했다.
불량 상품 단속·우수 상품 진흥 병행해야
정부는 덤핑 관광의 문제를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5월 불합리한 저가 상품으로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고 쇼핑을 강요하다 적발된 국내 중국 전담여행사에 대해 영업 정지 처분을 내렸다. 행정처분이 실제 시행된 것은 2016년 중국 단체 관광객 유치 전담여행사 업무 시행지침에 처벌 규정이 생긴 이후 처음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임주희 주무관은 “최근 전담여행사의 단체 관광 유치 실적과 이탈에 대한 분기별 전수조사를 시행 중”이라며 “저가 단체 관광 상품에 대한 비밀평가를 시행하고 관광불편신고센터를 이용해 덤핑 관광을 적극적으로 근절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특별시도 관광 옴부즈만 제도를 도입해 불시에 여행사를 점검하고 불법관광신고센터를 운영해 패키지 관광에서의 불만 사항을 수리하고 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 제도를 이용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란수 교수는 “짧게 한국을 왔다 가는 외국인들이 이런 제도를 알기는 어렵기에 신고 제도를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신고센터가 하는 일이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와 겹치는 경우 사안을 바로바로 해결하기 어려우니 기관 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덤핑 관광을 단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관광 경찰제 부활도 거론된다. 2013년 출범한 관광 경찰은 외국인 관광객을 보호하고자 길 안내, 쇼핑 강매 해결, 바가지요금 방지 등의 업무를 맡아왔지만 지구대에 일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을 확충해야 한다는 이유로 지난해 해산했다. 이도선(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관광 경찰제 시행 당시 불법 가이드 행위나 바가지요금 같은 관행을 현장에서 즉각 단속해 범죄 근절을 넘어선 예방 효과까지 있었다”며 “실효성뿐 아니라 상징성까지 고려한다면 부활의 명분이 충분하다”고 전했다.
한편 덤핑 관광에 대한 엄격한 단속만이 해답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박상현 교수는 “덤핑 관광은 잘못된 것이지만 저가 상품이 여전히 판매되는 건 그만큼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며 “무조건 단속만 하면 저가 상품이 모두 사라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A여행사에서 운영하는 7월 1일 출발 예정인 방콕·파타야 5일 단체 관광 상품의 경우 같은 관광 일정임에도 팁·쇼핑·옵션 투어가 포함된 상품은 28만9000원이지만 노팁·노옵션 상품의 경우 129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해외 관광 상품이지만 쇼핑이나 옵션 투어가 추가되지 않는 관광 상품이 기존 저가 상품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질 수 있다는 점은 국내 관광 상품도 다르지 않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종 웨이(Zhong Woei, 남·30) 씨는 “쇼핑 압박 경험이 없던 건 매우 비싼 단체 관광을 이용했을 때였지만 관광 패키지 가격이 비싸서 비용 부담이 컸다”고 전했다. 박상현 교수는 “저가 상품이 점점 사라지면서 여행사의 매출액이 급감하면 여행 산업 전체가 타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김형곤 교수도 “저가 상품 중에도 좋은 상품이 있을 수 있다”며 “시장 성숙도가 높아지면 질 낮은 저가 여행 상품이 선택되기 어렵기에 좋은 상품을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는 체계적으로 구성된 단체 관광 상품에 대한 지원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년간의 유치 실적과 재정 건전성, 지역 관광 활성화 정도, 법·규정 위반 심사를 거쳐 외국인 전담여행사를 지정하는 한편 한국여행업협회와 함께 우수여행상품공모전을 열어 한국을 가장 잘 소개한 상품을 선정해 지원하기도 했다. 임주희 주무관은 “선정된 상품에는 외국인 유명 인플루언서를 초청하고 여행사를 현지 박람회에 참가시켜 상품 홍보를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광 성장 돕는 데일리케이션
한국 관광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최근 여행 트렌드인 데일리케이션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데일리케이션이란 일상(daily)과 휴가(vacation)를 합친 단어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을 외국인들이 그대로 경험하는 관광 형태다. 정란수 교수는 “일상 관광 콘텐츠를 적극 활용해 저급 덤핑 상품을 벗어난 다양하고 공정한 볼거리가 있음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은 한국 콘텐츠에 등장하는 분식집, 편의점, 셀프 사진관, 동네 카페 등 소소한 일상을 매력적인 관광 소재로 받아들인다. 호주에서 온 스콧 테일러(Scott Taylor, 남·29) 씨는 “한국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셀프 사진관을 이용하고 저녁엔 치킨과 맥주를 즐겼던 게 추억으로 남았다”고 전했다. 천옌루(陳妍儒, 여·24) 씨는 “중국 SNS 샤오홍슈에서 홍대에 있는 사주집이 진짜 잘 맞는다고 추천해 가봤다”며 “대만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사장님이 현실적으로 조언해 주셔서 만족했다”고 말했다. 조윤미 한국관광공사 관광콘텐츠전략팀장은 “코로나19 이후 OTT 산업이 증대하고 K-콘텐츠가 세계를 강타하며 한국 드라마, 예능 등이 외국인들에게 더 친숙해진 결과”라고 전했다. 정란수 교수는 “외국인들이 한국 방문을 더 자주 하게 되며 한국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욕구가 커진 당연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관광에 특화되지 않은 동네 카페나 분식집, PC방 등 일상적인 공간들은 전형적인 관광지보다 관광 수용 기반이 약해 운영자들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 부족하거나 안내 시스템이 잘 구비되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서울시 관광 안내 동아리 서울메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민수(문과대 사회24) 씨는 “외국인들을 데리고 카페나 치킨집을 가면 외국어 메뉴판이나 표지판이 구비되지 않은 곳이 많아 통솔하기 어려운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천옌루 씨도 “사주를 보려면 어느 정도 한국어를 알아들어야 해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나 유학생들이나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일상 공간에 관광객이 늘어나면 지역 주민의 거부감이 커질 수 있기에 외국인 수용성을 높이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제다. 정란수 교수는 “데일리케이션은 결국 지역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침투하게 된다”며 “주민들이 오버투어리즘, 사생활 침해 등의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윤미 팀장은 “지역 특성과 지역 상인들의 의지를 반영해 민간, 지자체 주도로 단계적으로 데일리케이션 활성화 과제를 풀어가야 한다”며 “번역 안내문 증대, 외국어 메뉴판 보급 등 실질적이고 부담 없는 지원에 더해 한국의 일상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최근 관광 벤처 기업에서는 한국형 사주 보기, 한국 술 게임 체험 등 외국인이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사업을 판매 중이다. 한국관광공사 또한 재작년 데일리케이션 프로모션 사업을 통해 지역 기반의 일상형 관광 콘텐츠를 발굴했으며, 최근에는 외국인 대상 키움 히어로즈 야구단 홈경기 관람 연계 상품을 개발하기도 했다.
결국 한국 관광의 미래는 덤핑 관광의 구조적 문제 해결 후 여행객과 지역사회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관광 모델로의 전환에 달려 있다. 조윤미 팀장은 “관광의 중심이 점점 대형 관광지에서 지역의 일상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데일리케이션은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는 모델이라 관광 환경을 정비하면 충분히 주류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글|김재현 기자 remake@
사진|안효빈 기자 lightb@
사진제공 | 한국관광공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