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라브리에서 인식 변화

난민 위한 사회적 기업 설립

“혐오 대상 아닌 용감한 이웃”

 

박진숙 대표는 “아직도 한국에서의 난민에 관한 논의는 더디다”며 “용감한 이웃인 그들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박진숙 대표는 “아직도 한국에서의 난민에 관한 논의는 더디다”며 “용감한 이웃인 그들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박진숙(불어불문학과 92학번) 에트랑제 대표는 16년간 난민의 사회·경제적 자립을 돕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해 왔다. 난민과의 미술치료 수업을 기반으로 그림 판매, 엽서 및 상품 제작, 전시회 및 바자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으로 떠나온 국가의 고유 문화를 알릴 수 있도록 돕던 박진숙 대표는 앞으로도 장학회 활동 등 난민 자립에 앞장설 예정이다. “난민 친구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이 부족할 때보다 그 친구들과 마음이 맞지 않을 때가 더 힘들었습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한국에서 자신감을 되찾고 홀로 서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요.”

 

  낯선 스위스에서 만난 이방인

  박진숙 대표는 경기도 이천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나 학업 걱정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다 학구열 강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천에서 수원까지 멀리 학교를 다녀야 하는 터라 혼자 살게 됐어요. 고등학교에 가서야 처음 대학 입시의 존재를 알았기에 3년 내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를 싸 들고 학교에 가 공부만 했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어요.” 홀로 학교 생활을 이어가던 박 대표는 우연히 불어 공부와 고려대 진학이란 목표를 갖게 됐다. “당시 좋아하던 교회 오빠가 고대법대에 진학해서 고려대를 목표로 삼았어요. 그러던 중 고등학교 불어 수업에서 프랑스인 선생님과의 수업이 흥미로워 불어불문학과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외로운 수험 생활 끝에 1992년 고려대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박진숙 대표는 생각보다 큰 학습 격차에 좌절했다. “서울에서 온 부유한 친구들은 외고를 나와 불어 공부를 하지 않고도 저보다 높은 성적을 받았죠. 밤새 공부해도 줄일 수 없는 간극에 농부의 딸인 제 처지와 그들을 끝없이 비교하고 비참해졌어요.” 열등감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안정을 찾기 위해 무작정 스위스 여행을 떠났다. “당시 사귄 남자친구와 책 <이기적인 돼지, 라브리에 가다>를 번역하다가 라브리가 궁금해졌어요. 불어로 피난처를 뜻하는 기독교 공동체 라브리엔 자신만의 질문에 대한 답과 안식을 찾는 전 세계 청년들이 모인다고 하길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라브리의 본부인 스위스로 바로 떠났죠.” 

  스위스에 도착한 박진숙 대표는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을 괴롭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 내밀던 비교의 잣대임을 깨달았다. “어설픈 영어로 말해도 친절히 대해주던 룸메이트 친구들, 40대 딸과 여행 온 60대 할머니, 그 외 세계 각지에서 온 청년들을 만나니 세상엔 계급이 있고 격차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 무렵 박 대표는 독일인 친구 스테파니와의 만남으로 이방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됐다. “유럽 여행을 하다 독일에서 묵을 곳을 구하지 못했더니 라브리에서 만난 한 친구가 스테파니 남자친구의 집에서 묵을 수 있도록 스테파니를 소개해 줬죠. 그런데 독일은 처음이라 기차도 몇 번 놓치고 연착까지 되면서 반나절이나 더 걸려 도착했어요. 스테파니는 제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저를 기다린다고 승강장에 계속 앉아 있었죠.” 일면식 없는 자신을 위해 반나절 넘게 기다려 준 스테파니를 보며 박 대표는 자신도 훗날 이방인에게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스테파니에게 전 어떠한 인연도 없는 철저한 이방인이었잖아요. 그런데도 재워주고 먹여주며 무조건적인 환대를 해줬어요. 저도 언젠가 이방인을 환대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죠.”

 

  경력 단절기에 난민과 만나다

  한국에 돌아온 박진숙 대표는 라브리 한국 지부에서 단기로 상담과 식사 준비 등 일손을 도우며 불어 공부에 전념했다. “외국에서 각국 친구들과 생활하다 보니 언어에 자신감이 생겨 불어 공부에 흥미를 붙였죠. 4학년 전공 수업에서 프랑스 영화를 공부하며 미학에 호기심을 갖기도 했고요.” 그는 서울대일반대학원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결혼과 임신을 맞이하며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가정을 꾸린 뒤 남편과의 소통, 생활 패턴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넘쳐나는데 일과가 끝나면 책상에 앉아 대학원 과제를 하는 제 모습이 싫었어요.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데 뜬구름 잡는 미학을 공부하다 보니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컸죠.” 졸업장까지 따냈지만 학문에 흥미를 잃은 그는 이후 뚜렷한 목표 없이 6년간 육아에만 전념했다. “남편은 고대법대를 졸업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느라 오전 7시부터 자정까지 공부만 했죠. 독박 육아는 당연했고 정상적인 가정생활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경력 단절과 육아로 자존감이 낮아진 박진숙 대표는 남편의 사법고시가 끝나자마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양양 라브리로 떠났다. 박 대표는 양양 라브리에서 묵으며 간사로서 운영을 담당했다. “산과 바다, 강을 따라 걷고 청소와 식사 대접을 하며 농사를 짓고 사람들과 수업, 상담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과였어요. 공동육아가 시작됐고 결혼 4년 만에 인간다운 생활도 했죠. 월급은 70만 원이었지만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양양 라브리는 이방인을 환대하겠다는 박진숙 대표의 가치관을 실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스위스에서의 저처럼 저마다 고민과 상처를 안고 찾아온 젊은 청년 모두를 따뜻하게 맞이했고 식사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들어줬죠. 그러나 저는 그들이 아파하면 아파하고 분노하면 분노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한 청년이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다며 저를 찾아왔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기계적으로 공감하는 제 자신이 너무 가식적이라 자책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박 대표는 부족하다고 느낀 상담 능력을 키우고자 다시 학교에 가기로 했다. “전문적으로 상담학을 공부하고 상담 기법을 익힌다면 그들을 더 환대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고민과 상처 대부분이 사람과 가족에서 시작되기에 아동가족학과 상담학을 공부하러 두 번째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연세대 일반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박진숙 대표는 사법연수원을 다니며 난민 연구 모임에 참석하던 남편으로부터 불어권 아프리카 난민들의 서류 번역을 요청받았다. “인터뷰를 위한 질문지를 불어로 작성하거나 소송에 필요한 서류를 번역해 줬죠. 그러다 통역도 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인생에 개입했다는 생각이 들어 강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서류 번역을 계기로 다시 난민과 가까워진 박 대표는 남편의 설득으로 NGO ‘피난처’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며 콩고 출신 난민 기혼 여성 4명을 대상으로 정기 한글 교습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들이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집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요. 저도 모르게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수업이 거듭될수록 성실히 임하고 저를 존중하는 모습에 마음의 벽이 사라졌어요. 엄마로서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도 나누다 보니 완전한 친구가 됐습니다.” 박 대표는 난민들이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자일 수 있음을 경험하기도 했다. “책 한 권을 다 배우면 간단한 음식으로 파티하는 행사를 열었어요.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난민 친구들이 콩고 전통 음식을 소개하고 싶다고 했죠. 20인분이 넘는 양을 준비하는 데도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하고 모두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기뻐하는 난민 친구들을 보며 도움받는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베푸는 사람으로 바뀐 그들의 모습에 참 뿌듯했어요.” 

  박 대표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확신을 느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34년 동안의 여정이 있었나 싶었어요. 불어 공부부터 이방인으로서 환대받은 경험과 상담 공부까지, 모든 활동의 퍼즐이 맞춰지자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확신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난민 지원 사업을 구상하던 박 대표에게 캐나다에서 열리는 이주민 연례회의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대학원 수업과 육아를 멈추더라도 난민 수용, 제도 등이 잘 갖춰진 캐나다로 가고 싶었어요. 한국에선 난민을 인정할 것이냐는 걸음마 수준의 단계를 두고 토론하는데 이주민 성소수자 등 세밀한 내용으로 토론하는 캐나다가 부러웠죠. 캐나다 연례회의에 참여하며 현장을 경험한 뒤 한국에 돌아가서 난민 자립을 돕고 사회적 의제를 던지는 전문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연례회의에서 본 이주민들의 작품 전시회를 참고해 여성가족부의 지원으로 ‘다문화 공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처음엔 미술치료 목적으로 난민 친구들과 그림 수업을 진행했어요. 그러다 그들의 그림에서 아프리카만의 이국적인 색채와 전통 문양이 매 력적이라고 느꼈죠. 색다른 문화를 알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정부 지원 사업을 찾아 엽서 세트부터 그림이 그려진 옷, 머그잔 등의 상품을 제작해 판매했습니다.” 1년간의 프로젝트는 성공이었지만 지원이 끊기자 활동을 멈춰야 했다. “열심히 달리던 차의 시동이 갑자기 꺼진 느낌이었죠. 그림으로 고향을 추억하던 콩고 친구들도 무척이나 행복해했는데 그 행복을 지속할 수 없다는 허무함이 가장 컸어요. 외부 지원이 끊겨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설립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난민에게 맡긴 난민 사회적 기업

  2009년 박진숙 대표는 난민 여성의 치유·성장·자립을 목표로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를 설립했다. 설립 이후 첫 행사는 콩고 여성들의 그림 전시회였다. “카페를 대관해 관객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구경하게 하고 그림 팔기 경매도 진행했죠. 그들의 그림이 그려진 프린팅 티셔츠, 컵으로도 제작하다 보니 콩고 난민 친구들이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1년에 두 번씩 정기 전시회를 열고 꾸준히 디자인 상품을 개발하며 사회적 기업 오르그닷과 협업하기도 했다. “2000만 원을 들여 만든 티셔츠를 모두 매진시킨 뒤 축하 행사를 열었어요. 콩고 친구 중 한 명인 미야가 앞에 나와 ‘나의 콩고 문화를 한국 사람들이 입고 다니니 너무 뿌듯하다’고 말했어요. 협업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린 발언에 소름이 돋았죠.”

  2019년 박 대표는 10년 넘게 이끈 에코팜므를 미야에게 넘겼다. “10년 넘게 수많은 강연, 대회, 전시회를 진행하며 제 말보다 미야의 말이 더 호소력 있음을 확연히 느꼈어요. 이참에 미야가 대표가 되면 난민의 사회·경제적 자립과 난민 여성들이 사회적 기업의 리더가 된다는 에코팜므의 목표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죠.” 

  에코팜므를 떠난 박진숙 대표는 1인 사회적 기업 ‘에트랑제’를 설립해 난민 지원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에트랑제의 대표 사업은 아프리카 여성 플로렌스와 함께 아프리카의 천을 이용해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공정무역 판매 국제 사업, 난민 그림책 프로젝트 디렉터, 난민 다큐멘터리 기획 등 다양하다. 후원자를 모집해 난민 아동이 방과 후 태권도 학원, 미술 학원, 피아노 학원 등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도록 장학금을 지원하는 난민 아동 장학모임 ‘우모자’도 만들었다. “한 달에 100여만 원의 학원비도 지출하는 한국 가정과 달리 난민 가정은 한 달 평균 15만 원 하는 학원비도 충당하기 어렵습니다. 난민 아동들이 박탈감을 덜 느끼고 유년 시절에 즐겁게 배운 기억을 간직하길 바라요.” 

  박진숙 대표는 앞으로도 난민의 경제적 자립과 적응이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을 예정이다.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미쇼는 인도적 체류권을 얻어 현재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고 있어요. 미야는 다문화 이해 교육 강사와 영어 강사를 하고 있죠. 앞으로도 온 힘을 다해 난민의 성장과 자립의 기틀을 제공하고 싶고 그들의 친구이자 버팀목이 되고 싶습니다.” 박진숙 대표는 진정으로 몰입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 삶은 의도한 대로 흐르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임한 태도 하나로 오늘의 삶이 완성됐어요. 불어 공부와 라브리에서의 일, 에코팜므 운영 모두 어느 순간 몰입의 퍼즐을 맞췄죠. 어떤 일이든지 대가에 연연하지 않고 3년만 쏟아붓는다면 여러분의 자산이 될 겁니다.”

 

글 | 김정린 기자 joring@

사진 | 이경원 기자 won@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