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학년 2학기>의 GV(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나서며 나는 첫 일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영화에서 작업 현장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처음 봅니다” 그래서 놀랍다는 얘기였다. 왜 우리는 영화에서 일하는 장면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것일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이 좋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거친 작업 현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통찰을 슬쩍 빌려 온다면, 이렇게 해서 노동이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는 상품을 생산하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생산한 잉여가치 일부를 임금으로 받을 뿐이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일하는 장면은 지루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3학년 2학기>의 많은 비중은 특성화고 졸업반 학생들이 공장에서 연수받는 장면에 할애되어 있다. 그라인더로 금속을 자르고, 용접봉으로 금속을 붙인다. 이 장면을 보는 나는 기분이 아슬아슬하다. 약간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럼에도 안전장치를 보완해야 할 필요성은 일 시키는 이들의 입장이 아니다. 힘도 없는 연수생들이 그걸 요구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이것은 부조리다. 대통령이 아무리 산업 안전을 외쳐도 이윤의 논리에 복속된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안전을 등한시한다. 그러나 이제 갓 공장에 파견된 학생들은 회사에 잘 보여야 정규직으로 취직이 되고 전문대 입학 추천도 받을 수 있다. 몸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찍 소리를 낼 수 없다. 예정된 약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현장의 작업 장면은 바로 이런 메시지를 관객 스스로 구축하라는 요청을 드러내지 않고 들이민다. 그러므로 관객은 스스로 문제의식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소재 영역의 참신성에만 머물지 않는 이 영화의 전략적 미덕이다. 이것이야말로 관객을 스스로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대우하는 태도다. 대부분의 상업 영화는 관객이 호모 사피엔스가 되는 걸 귀찮아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눈만 뜨고 있으면 감각할 자극들을 무자비하게 퍼부어댄다. 여백의 미는 상업적 실패의 지름길이다. ‘왜 우리를 인간으로 대우하는가?’ 생각하기 싫은 관객들이 화를 내기 때문이다.
수능 시즌만 되면 온 나라가 들썩인다. 세상 모든 이들이 수험생인 듯 군다. 그러나 고3 학생들 가운데 30%는 대학에 가지 않는다. 많은 특성화고 학생들은 이른 취업의 길에 나선다. 뉴스에서 수능 얘기가 나올 때, 방송 프로그램마다, 상점가마다 수능 수험생에 대한 응원 메시지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것이 일찌감치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의 열패감이라면, 사회는 그들의 자존감을 책임져야 한다. 특성화고 3학년 2학기의 아이들은 아직 노동자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보살핌받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다.
이 영화는 교육 영화이자 노동 영화다. 특성화고 교사들이 이 영화를 자신의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직무 유기다. 그들이 학창 시절에 욕하던 그 교사들과 다를 바 없는 꼰대가 되었다는 건 너무 참담하지 않은가?
최광희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