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본에 오기 전 살았던 서울 구의동 집에서는 역까지 가는 길에 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첫 번째 보도를 건너 공원 앞 자전거 대여소를 지나 두 번째 보도에 서는 순간 신호등에 초록불이 탁 들어온다. 절묘한 타이밍에 감탄한 나는 시민의 편의를 중시하는 공공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독일에서도 재미있는 사례를 모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독일 땅을 밟은 내 눈에 띈 것은 횡단보도 버튼이었다. 기숙사로 가는 길 신호등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지쳐 길을 건너려는데 누군가 신호등 기둥의 버튼을 눌러줬다. 독일의 횡단보도 신호등은 자동으로 켜고 꺼지는 것이 아니라 보행자가 버튼을 누를 때에만 신호가 바뀐다.
두 번째는 대중교통의 문 열림 버튼(Türöffner)이다. 독일의 버스나 지하철은 승객이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 정차한다고 해도 타고 내리려는 승객이 없다면 굳이 문을 열지 않는다. 처음에는 하차 버튼과 별개로 문을 여는 버튼을 또 눌러야 하는 일이 성가시게 느껴졌지만 버튼의 필요를 실감한 일이 있었다.
저녁 퇴근 시간의 트램은 일반 좌석은 물론, 휠체어나 유아차를 둘 수 있는 공간까지 입석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보행 보조기와 함께 트램을 탄 승객도 문 앞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승하차를 원하는 승객들이 다른 문을 이용했기에 그 문이 열리고 닫힐 일은 없었고, 그는 정차할 때마다 이동하지 않아도 됐다. 만약 실제 승객들의 동선과 무관하게 문이 매번 열리고 닫혔다면 그는 불필요하게 자리를 옮겨야 했을 것이다.
이런 사례를 모아 보며 이 도시가 유연하게 설계됐다고 느꼈다. 도시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살아간다. 모두를 위한 공공디자인이라면 하나의 고정된 방식을 고집하기보다는 각각의 맥락에 적용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춰야 할 것이다. 보행자가 필요한 순간에 불이 켜지는 신호등과 승객이 있어야 열리는 트램의 문처럼 말이다.
유혜원(문과대 철학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