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타이거쌀롱에서 소개할 현대 한국 소설의 중요한 장면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에서 골랐다. <소년이 온다>는 2024년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며 다시 조명받은 작품이기도 한데, 이 가운데 한 부분을 같이 읽어보려고 한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5·18항쟁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1장의 주인공 소년 동호(‘너’)는 도청에서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무수한 주검들과 마주한다. 동호가 하는 일은 그 시신들을 염하는 일이다. 동호는 시취(屍臭)를 줄이기 위해 켜 놓은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13쪽)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느낀다. 동호는 생각한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중략)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같은 쪽) 이 장면은 단순한 희생자로 남기를 거부한 광주의 영혼들을 향한 애도인 동시에, 그 영혼들이 산 자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공감을 표현한다. 이 질문은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언급한 질문)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작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겪었을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정말로 그러하다고.
1장 ‘작은 새’는 소년 동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죽은 몸 곁에서 잠시 머물던 ‘영혼들’, 촛불이 일렁일 때 날갯짓 하던 이들이 모두 작은 새다. 이 아름답고 비통한 이미지는 진혼과 애도를 넘어서, 소설 전체에 걸쳐 변주된다. 3부 이하에서 광주 이후에 살아남은 이들의 힘겨운 삶에도 이 힘겨운 파닥임이 이어진다.
2장 ‘검은 숨’은 동호의 친구이자, 이제 막 죽음을 맞이한 중학생 정대의 시선으로 시작한다. 계엄군은 도처에서 시민들을 죽이고, 시신들을 커다란 구덩이에 던졌다. 정대의 시신은 여러 다른 몸들과 함께 열십자로 포개어진 채 썩어가고 있다. 문학에서 유령이나 혼령은 통상적으로 원념(怨念)의 주인이다. 그런 점에서 유령(revenant)은 거듭해서 되돌아오는 자다. 자신을 죽인 자를 아들에게 말해주려고 돌아온, <햄릿>의 부왕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소년이 온다> 속 ‘회귀하는 유령’은 이들과 다르다.
이런 식이다. “그들이 트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어. 끝까지 지켜보라는 명령을 받은 듯, 일병과 병장 계급장을 단 군인 둘만 부동자세로 제자리에 남았어. 나는 그 어린 군인들을 향해 어른어른 내려갔어. 그들의 어깨와 목덜미 언저리로 번지며 앳된 얼굴들을 들여다봤어.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들 속에서 불타고 있는 우리들의 몸을 봤어.”(62쪽) 유령이 된 정대는 가해자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일 대신, 군인들에게서 또 다른 ‘앳된 얼굴들’을 본다. 주검을 지키는 군인들은 학살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수족일 테지만, 정대가 보는 것은 ‘어린 군인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들의 불타는 몸이다. 정대의 혼은 그들이 나를 죽였노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도 참상 앞에서 떨고 있었노라고 말한다.
한강이 그려낸 유령은 함께 슬퍼하고 고통받고 공감하는 유령이다. 정대의 혼은 같은 망자들의 혼을 느끼기도 한다. “자정 무렵이었던 것 같아, 가냘프고 부드러운 무엇이 가만히 나에게 닿아온 것은. 얼굴도 몸도 말도 없는 그 그림자가 누구의 것인지 몰라 난 잠자코 기다렸어. (중략) 서로에게 말을 거는 법을 알지 못하면서, 다만 온 힘을 기울여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어. (중략) 무엇인가 조용히 내 그림자에 닿는가 싶으면 그때마다 다른 혼들이었어.”(48~49쪽) 유령들은 가만히 ‘그림자를 맞댄 채’ 함께였다가 혼자이기를 반복하면서 정동(affect)으로서 거기 있는 존재, 즉 ‘우리’가 된다. 육체가 없으니 맞댈 것이 없고, 그러면서도 서로 겹친 ‘죽은 육신’을 통해 연결된 관계들이다. 서로에게 기대는 혼들의 관계를 ‘그림자’로 표현한 것 역시 절묘하다. 혼들은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정동’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되고 구성되는 감응의 힘, 그 힘의 강도와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몸을 잃고 나서 말을 할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포개진 육신 곁을 지키면서 서로를 느낀다. 바로 이 정동이 동호와 정대를 비롯한 1980년 5월 광주를 지키고 스러져간 이들을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훗날 그것은 (시민군 김진수의 죽음을 증언하는) 대학생(‘나’)의 고백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114쪽)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처럼, 소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회귀’하며,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긴 시차를 견뎌, 저 정동이 ‘읽는 자’의 몸을 통과할 때, 정동은 새롭게 구성되고 현재화된다. 그로써 ‘읽는 자’는 정동의 상호성에 연루되는 것이다. 2025년 5월, 우리는 응답의 요청을 받는다. 고립된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현재화된 정동과 감각, 느낌에 참여할 것, 그 속에서 ‘함께 겪는’ 감응의 존재가 될 것을 말이다. 바로 그것이 한강의 유령이 보여주는 존재론이다.
양윤의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