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별한 관심 때문에,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들을 연이어 소개하게 되었다. 한강의 유령이 역사적 폭력의 증언자라면, 정보라의 유령은 원념(怨念)을 품은 무서운 타자다. 오늘 소개할 유령은 억울하거나 무섭지 않다. 생시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산 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선한 이웃이다. 윤성희의 단편 ‘자장가’에 등장하는 유령이다.
윤성희는 유머를 가장 잘 다루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윤성희가 소개하는 유머는 냉소나 풍자와는 거리가 멀다. 윤성희식 유머는 인간의 선함과 다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정동 발생 장치다. 작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죽은 자, 떠난 자, 실패한 자들이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슬픔에 물들어 있지만, 슬픔은 탄식이나 비관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슬픔을 ‘함께-있음’의 증거로 여긴다. 죽은 이는 산 자를 염려하고 산 자는 죽은 이를 그리워한다. 이는 윤성희 소설의 문체적 특성과도 연결된다. 짧은 호흡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이런 방식으로 리듬을 만든다. 1) 엄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2) 나는 엄마를 불렀다. 3) 엄마는 듣지 못했다. 4) 그래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이 문장들은 심장의 박동처럼 인물들을 비트(bit)로 변환한다. 윤성희에게 공존재(共存在)는 함께 두근거림이다.
‘자장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등학생 딸이 엄마가 잠 못 이룰까 봐 자장가를 불러주는 이야기다. 엄마가 아이에게 불러주는 노래를 죽은 아이가 엄마를 위해 불러준다는 뒤집힌 설정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그런데 딸은 천진하게도 살아있었을 때와 똑같이 엄마를 찾아온다. 슬픔은, 죽어서도 계속되는 천진한 모녀 관계에서 계속 생겨난다, 작가 특유의 빠른 리듬을 타고. 이런 식이다. 나 때문에 며칠은 잠 못 이루었으면 했는데 엄마는 잘 잤다(딸). 꿈에서라도 딸을 볼까 싶어 자꾸 자는데 꿈속에 나오질 않아. 딸이(엄마). 어떻게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딸). 같이 누워서 손잡고 상상하면 돼(또 다른 아이-유령).
작가는 이 소설에서 웃음과 울음 사이, 삶과 죽음 사이를 노래와 꿈으로 메운다. 그 노래는 진혼가가 아니라 자장가이며, 그 꿈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소통이다. 죽은 이는 산 자를 염려하고 산 자는 죽은 이를 그리워한다. 소설 속 ‘짝짝이 양말의 날’은 이 관계를 잘 보여준다. 교장 선생이 한 학생의 자살 이후 이 행사를 제안한다. 짝이 맞지 않는 양말을 신고 등교하는 날이다. 이것은 애도의 일종이지만, 망각을 위한 애도가 아니라 함께-있음을 위한 애도다. 저 양말처럼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있다는 것,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잔향을 느낀다는 것이기 때문에. ‘잔존’에는 ‘남아 있음’이라는 뜻 외에도 ‘여전히 살아있음’이란 뜻이 있다. 죽은 자는 짝짝이 양말 신기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양윤의 고려대 학부대학 교수·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