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후로 토양 흘러내려
재난이 재난 낳는 악순환
“재난과 생물다양성 통합 관리해야”
이상기후로 인한 대규모 자연재해가 급증하고 있다. 올봄에는 영남 산불로 10만㏊가 넘는 땅이 불탔고 여름에는 서산, 광주 등 최소 11개 지역에 일 강수량 100㎜ 이상의 비가 1%의 발생 확률을 뚫고 내렸다. 이러한 자연재해는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의 서식지를 해치며 생물다양성을 저해한다. 국내 70% 이상 생물이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산림에 산불, 산사태, 폭우 등이 연속 또는 동시에 발생하자 피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적절한 산림 관리와 생물다양성을 고려한 재해 예방·복구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물다양성 파괴하는 괴물 날씨
산불 등 자연재해는 인간 활동으로 발생하지만 매년 심해지는 이상기후가 규모와 피해를 키운다. 지난 3월 9만9490㏊를 태운 경북 산불은 2022년 1만6301㏊를 태운 울진 산불 기록을 3년 만에 갈아치웠다. 산불이 끝난 여름에는 전국적으로 일 강수량 기준 발생 확률 1%대의 기록적 폭우가 내렸다. 2020년과 2023년에는 폭우로 인해 산청, 예산 등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고 올해 산불과 집중호우 피해액과 복구액은 각각 2조9128억 원, 3조8083억 원으로 총 6조7221억 원으로 집계됐다.
모경종 국회의원의 지난해 국정감사 정책자료에 따르면 1조 원을 밑돌던 기후재난 경제 피해액은 2019년부터 평균 2조5872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권춘근 국립산림과학원 산불연구과 연구사는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 산사태 등 기상현상이 단기간에 집중되면서 피해 규모와 빈도가 커졌다”고 밝혔다.
자연재해의 지속 기간이 늘어난 건 한국에 불어오는 편서풍과 제트기류가 충돌해 고기압과 저기압이 한자리에 오래 머무는 블로킹 현상 때문이다. 제트기류는 적도와 북극의 온도 차로 인해 북반구 중위도 대류권 계면을 초속 100m로 둘러 부는 바람으로 최근에는 북극 온난화로 궤도가 변하고 있다. 남재철 전 기상청장은 “약해진 제트기류는 북상과 남하를 3번 반복하며 북반구를 도는데 우리나라 상공에서 이뤄지는 한 번의 남하가 편서풍을 가로막고 기상 흐름을 방해한다”고 설명했다. 두 기류의 충돌로 대기가 정체되면 건조한 날씨를 만드는 고기압에서는 폭염과 산불이, 비를 만드는 저기압에서는 폭우가 지속돼 지상에 오랜 자연재해를 남긴다.
국토 면적의 64%를 차지하는 산림은 국가 생물다양성의 핵심이다. 성숙한 산림은 국내 탄소포집량의 68%를 저장해 기후를 안정시키고 낙엽과 죽은 나무가 제공하는 미세서식처는 수많은 곤충·지의류·토양 미생물의 핵심 거점 역할을 한다. 국내 생물의 70%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의존하는 산림의 생물다양성 보전 기능 평가액은 2023년 12조 원을 넘어섰다.
산불이나 산사태가 발생해 약해진 숲은 새로운 병해충에 피해받을 확률이 높다. 오정리질리언스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이우균(생명대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는 “산불과 산사태로 토양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 유익한 공생 생물은 사라지고 새로운 병해충이 등장하기에 면역력이 약화된 숲은 치명타를 입는다”고 말했다.
누적된 재해에 약해진 산림
이렇듯 자연재해가 서로의 촉매가 되면서 산림생태계가 받는 피해는 계절이 바뀌며 급속히 불어나고 있다. 겨울 가뭄은 봄 산불 발생 가능성을 높이고 산불은 여름 산사태와 가을 병해충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서준표 국립산림과학원 산사태연구과 연구사는 “산불로 뿌리가 그을리거나 잎이 타면 나무의 토양 보호 기능이 서서히 약화된다”고 말했다. 권 연구사는 “재가 토양 표면을 코팅하면 물에 의해 쉽게 쓸린다”며 “산불이 발생한 지역에서는 토양이 훼손돼 산사태 등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발생한 영남 산불도 겨울 강수량이 12% 줄어 건조해진 땅 위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남 전 청장은 “고온건조해진 편서풍이 상승하면서 유입된 태풍급 돌풍이 빠르게 산불을 확산시켰다”며 “겨울 가뭄이 이듬해 봄 산불과 여름 홍수, 산사태로 이어지는 현상은 물리적·생태적 취약성이 누적되면서 서로를 증폭하는 전형적인 *기후채찍질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자연재해가 단기간에 연속해 반복되면 산림의 회복력이 크게 약화돼 이상기후 현상에 더 취약해질 수 있다. 남 전 청장은 “기후변화로 이런 연쇄 고리가 강해질 가능성이 크다”며 “짧은 시간에 상반된 기후가 교차하면 회복 시간을 빼앗고 생태계 기반을 무너뜨린다”고 말했다. 복합 재해가 닥치면 생물다양성 역시 크게 낮아진다. 생물다양성이 높으면 생물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외부 변화에 영향을 덜 받고 개체수를 적절히 유지하지만 낮으면 낮을수록 작은 규모의 자연재해에도 쉽게 개체수가 감소한다. 예컨대 단일 산불은 동식물을 직접 몰아내는 수준에 그치기도 하지만 산불에 이은 산사태와 같은 복합 재난은 토사를 큰 규모로 흘려보내 숲, 들판 붕괴는 물론 지형 교란이나 이동로 단절 등을 낳는다. 권 연구사는 “복합 재난으로 평가되는 올봄 영남 산불 현장에선 너구리와 노루, 뱀 등 감각이 예민한 동물도 빠른 속도의 연기와 화염에 대피하지 못하고 질식했다”고 말했다.
산림에서 발생한 자연재해는 인근 담수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천에 쏟아진 흙과 부유물은 수중 식물의 광합성을 방해하고 수위와 용존산소가 빠르게 낮아지면서 적응하지 못한 수생물의 생명을 위협한다. 노태권 국립생물자원관 생물다양성총괄과 연구관은 “산불이나 태풍 등으로 표면의 토양이 노출된 상태에서 호우나 해일이 발생하면 더 많은 영양염류가 쉽게 유출되고 이는 토양뿐만 아니라 인근 담수생태계에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생태계에 대규모 자연재해가 닥치면 지형과 생물다양성을 원상태로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산림청에 따르면 산불이후 어류는 3년, 개미류는 14년이 지나야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동물이나 토양은 20년이 지나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노 연구관은 “재해를 겪은 생태계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전에 복합 재난이 연속 발생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훼손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솎아베기’ 산림복구 두고 찬반
산불은 다른 기후재난으로 이어져 생물다양성을 해치기 쉬운 만큼 예방은 물론 복원에서도 생태 친화적인 방식 도입을 채택해야 한단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우선 산사태를 대비할 목적으로 사방댐이나 철근 대신 대나무, 목채 등의 생물을 활용할 수 있다. 노 연구관은 “예방·복구와 동시에 자연의 조절기능을 회복하고 생물다양성 보전까지 기대할 수 있는 조치”라고 평했다. 강규석(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땅밀림을 방지하는 식물을 심고 지형의 토양에 잘 견디는 나무 종자를 뿌리내리면 인공적인 구조물 없이도 산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자연기반해법이 실효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 연구관은 “기후 적응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설계·시공이 복잡하고 비용과 시간도 더 들어 주민과 시행처의 충분한 이해 후 적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솎아베기로 산불에 취약한 침엽수 위주 산림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솎아베기는 나무들이 영양분과 햇빛을 차지하려는 경쟁을 줄이도록 일부 나무를 선택적으로 잘라내는 산림 관리 방식이다. 전국 산림의 36.9%를 차지하는 침엽수는 나무 사이 밀도가 높고 사계절 내내 잎이 붙어 있어 대형 산불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권 연구사는 “산림청에서 인공적으로 소나무를 심은 비율은 7%가 안 된다”며 “우리나라는 토양이 척박하고 기후대가 건조해 소나무가 상대적으로 쉽게 자생한다”고 말했다.
솎아베기로 산불을 확산시키는 낙엽, 죽은 가지, 솔잎 등 연료를 제거하면 산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강 교수는 “최대 50㎝까지도 쌓이는 층을 제거해 나무뿌리가 물을 더 머금게 하면 폭우 후 산사태가 날 확률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빈 곳에는 동식물이 서식할 공간을 확보하고 필요에 따라 더 유용한 나무를 심을 수도 있다. 강 교수는 “어린나무는 빠르게 생장하면서 활발하게 광합성하지만 50세를 기점으론 광합성량만큼 호흡하기에 탄소흡수율이 낮아진다”며 “가시나무, 대나무 등 탄소 포집 능력이 좋고 식생 환경이 알맞은 나무로의 교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반면 인위적인 솎아베기가 불필요하게 토양을 훼손시킨다는 우려도 있다. 숲은 빛·물·영양분 등 자원과 공간을 두고 생존 경쟁을 벌이면서 밀도가 낮아지는 자기 솎음질을 한다. 만들어진 공간에 빛이 들어오면 자연스레 하층 식생을 성장시키고 숲 전체의 생물다양성을 높일 수 있다. 정연숙(강원대 생명과학과) 명예교수는 “초기 숲을 이루는 40년이 지나면 **숲틈이 확보되는데 물리적 힘이 투입되면 뿌리·미생물·곤충 등이 집중된 표토 등 토양의 고유한 단층 구조를 교란한다”고 말했다. 인위적인 토양 훼손은 생물다양성 저해로 이어질 수 있다. 생물다양성협약 제15차 당사국총회가 채택한 결정문은 토양을 생물다양성이 손실되는 가장 취약한 자원 중 하나로 규정했다.
인공 조림이 궁극적으로 필요한지에 관한 의견도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산불이 발생해도 땅속뿌리와 지하줄기는 살아남아 지속적인 생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정 명예교수는 “참나무류 등 일부 수종은 불 난 해에도 1m 이상 자라고 20년 후에는 10m 이상에 면적 60~80%를 덮는 초기 숲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관리 없이 방치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강 교수는 “생태계가 훼손돼도 강한 자연 회복력을 갖는 건 맞지만 생태가 복구되기까지 소요되는 긴 시간 동안 산사태나 병충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리적 특성에 맞게 선별적으로 산림을 복원하는 절충안도 나온다. 이 교수는 “산불은 사람이 접근 가능한 전체 산림의 3분의 1 면적에서 발생한다”며 “이곳에 한정한 인공 조림은 효과적인 국토 관리와 재난 예방을 이끄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재난 대응, 멀리보고 재점검해야
재난 대응 체계를 생태계 순환 관점에서 개선할 필요도 있다. 인위적으로 구획한 개별 필지가 아닌 산과 하천으로 구성된 유역 전체 생태계의 흐름을 고려하면 효과적으로 재난을 예방하고 대응할 수 있다. 이 원장은 “폭우가 강해지면서 산 정상 부근에서 산사태가 나도 토사가 중턱에서 멈추지 않고 계곡을 따라 밀고 내려와 농경지와 저수지에도 침수 피해가 발생한다”며 “생태계 보전을 위해선 자연이 만든 유역권을 재난 관리 체계의 단위로 설정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후재난으로 인한 생물다양성 피해를 본격적으로 다룰 국가 단위 전략도 뒷받침돼야 한다. 제5차 국가 생물다양성 전략은 전국적인 기후재난으로 타격받은 생물다양성 보존 목표를 다루고 있지 않다. 각 지자체는 농가 등 재난복구가 우선이라 생태복구는 계획이 없는 실정이다. 남 전 청장은 “복합 기후재난에 대응하려면 단일 부처를 넘어 장기 회복력을 끌어올릴 기후변화 정책과 단기 대응력을 갖춘 재난 정책의 융합이 필수”라고 밝혔다.
*기후채찍질: 기후변화로 극심한 가뭄과 폭우가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
**숲틈: 산림에서 숲지붕에 생긴 틈.
글 | 백하빈 기자 hpaik@
인포그래픽 | 주수연 기자 yoyeon@
사진 | 박인표 기자 inpyo902@
사진제공 | 권춘근 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