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예산 배정 후순위
전문 학예연구사 적어 업무 과중
“재정 다변화해 교비 의존 줄여야”
사립대학 박물관은 국보와 보물을 비롯한 수만 점의 유산을 보유하고도 재정과 인력 부족으로 전시와 연구,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학의 자체 예산에 의존해 운영되는 만큼 예산 배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교육 프로그램과 기획전시의 규모가 축소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전문가들은 재정 기반을 다변화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대학박물관의 고유한 역할 보존이 어려울 것이라 경고한다.
인력 부족에 전시·연구·교육 위축
국내에는 105개의 대학박물관이 있으며 한 박물관당 평균 2만2504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는 국립박물관의 평균 소장품 수(9만1015점)보다는 적지만 공립박물관(7407점)의 약 3배, 사립박물관(1만2500점)의 약 2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사립대학 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국보와 보물을 비롯해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큰 유물이 많다. 고려대 박물관은 국보 3건과 보물 6건을 비롯해 고고·역사 자료부터 서화와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약 10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시·도 지정문화재와 향토 유물을 소장한 대학박물관은 지역사 연구 거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부산에서 가장 많은 유물(2만6000점)을 가진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국보 2건, 보물 18건과 국가 및 지방 지정·등록유산 59건 209점을 보유하고 있다. 1960년대부터 부산·영남 지역의 유적 발굴을 직접 수행하기도 했다.
사립대학 박물관은 귀중한 문화·역사적 가치를 지니지만 소수 인력이 방대한 소장품을 관리하는 탓에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 기획에 어려움을 겪는다. 석당박물관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의 독립건물에 2만6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나 정규직 학예연구사 3명이 연구와 전시 기획, 교육을 전담한다. 원광대 박물관 역시 지하 1층과 지상 4층의 전용 건물에 약 1만8000점의 유물을 관리하고 있으나 학예연구사 3명 중 2명이 계약직이고 나머지 1명도 예비 학예인력 지원 사업으로 채용된 연구원이다. 인력이 적어 한 사람이 전시 기획과 유물 관리, 교육 등 많은 업무를 맡다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고 적극적인 사업 추진도 어렵다. 남승덕 석당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콘텐츠 제작이나 유물 디지털 아카이빙은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인데 별도의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다른 업무까지 병행해야 해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이미령 원광대 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적은 인력으로 전시나 교육 프로그램 기획 등을 준비해야 해 업무량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 본부가 사립대학 박물관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박물관 자율 판단으로 정규직 인력을 충원할 수 없다. 2년 후 정규직 전환 의무가 발생하는 정부의 예비 학예인력 지원 사업으로 인력을 충원할 수 있지만 인건비 부담을 이유로 정규직 전환 대신 계약 종료를 택하는 박물관이 많다. 안신원 한양대 박물관장은 “인력이 부족하지만 대학이 인건비 부담 때문에 정규직 충원을 꺼려 유물·전시 담당 직원을 계약직으로 수시 채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학예연구사는 “대학에 학예 인력 충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사업에 따라 필요 인력을 고용하다 보니 전문성이 쌓이기도 전에 인력이 교체되는 현상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지원 부족에 기초 시설도 운영난
사립대학 박물관은 고등교육법상 대학의 부속기관으로 분류돼 운영에 필요한 시설 관리비를 국가로부터 직접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교육부 관계자 A씨는 “대학이 지원 사업에 선정돼야 그 예산 내에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대학은 재정 부담 때문에 박물관 지원에 소극적이다.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린 사립대학 박물관은 유물 보존과 관리에 필수적인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거나 낡아도 제때 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항온·항습 장치는 온·습도의 급변으로 인한 목재 갈라짐이나 곰팡이 발생을, 특수 조명은 빛에 약한 종이와 직물 유물이 퇴색되는 것을 막지만 장비 가격이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에 이르는 데다 일정 주기로 전면 교체가 필요해 대학 재정에 큰 부담을 안긴다. 동의대 박물관 관계자 B씨는 “항온·항습 장치가 있었으나 노후화되면서 관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 폐기했다”며 “현재는 냉난방기를 이용해 소장품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 박물관장은 “항온·항습 시설을 교체하는 데 억 단위 비용이 드는 만큼 대학 교비로 충당해야 하지만 재정 한계가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주요 소장품 복원을 지원하는 정부 보조금도 적은 탓에 사립대학 박물관은 자체 예산이나 외부 공모 사업에 의존한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5년 주기로 문화유산의 보존·관리 상태를 조사하지만 대학박물관의 소장품 보존을 위한 사전 직접 지원은 제공하지 않는다. 정기 조사에서 소장품 등급이 D(정밀조사)나 E(보존처리)로 판정돼야만 국고보조사업으로 사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마저도 긴급 보존이 필요한 일부 소장품에 한정되기에 상당수 관리와 복원은 대학 자체 재정에 맡겨져 있다. B씨는 “대규모 복원·보존 사업을 진행할 수 없어 긴급하게 필요한 유물만 선택적으로 관리한다”고 말했다.
자체 재정 확보 방안 구상해야
사립대학 박물관은 재정 마련 경로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박물관 자체 굿즈 제작, 대관 운영, 외부 협업 등 수익 창출 모델을 개발해 자립 기반을 넓힐 필요가 있다. 김대욱 대학박물관협회 정책국장은 “굿즈 사업은 초기 투자와 관람객 규모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며 “대학박물관이 실질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제도적 지원과 함께 차별화된 공간과 프로그램이 결합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박물관은 30년 가까이 아트샵을 운영하며 특별전과 연계된 도록과 소장품을 활용한 기념품을 꾸준히 제작하고 판매해 왔다. 장남원 이화여대 박물관장은 “아트샵은 지금까지 손실 없이 운영됐고 해외 관광객과 국내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대 석당박물관은 세미나실과 로비를 대관해 자체 재정을 마련하고 있다. 박물관 내부 시설을 개방해 교내외 단체가 교육과 학술 활동을 박물관에서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운영비를 마련했다. 최근에는 ‘2025 동아굿즈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어 전통 유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학생들의 문화상품 아이디어를 모으기도 했다. ‘해를 닮은 벽시계’, ‘부산 전차 쿠키 세트’ 등 수상작은 향후 기념품 제작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남 학예연구사는 “앞으로도 수익 창출과 동시에 교육적 의미를 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학박물관이 역사 기록과 교육, 연구 등 고유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기 계약 위주 고용구조를 개선해 장기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 학예 인력이 전문성을 쌓을 수 있도록 정부의 예비 학예인력 지원 사업에 일정 기간 근속 후 전환 시 인건비 일부를 국가가 지원할 필요가 있다. 남 학예연구사는 “박물관 운영과 연구·교육 활동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장기 인력 확보가 필수”라며 “단기 지원을 넘어 안정적 고용을 보장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립대학 박물관 운영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대학 차원의 인식 변화도 뒷받침돼야 한다. 김 정책국장은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나 대학 본부가 대학박물관을 단순 부속기관이 아니라 학문과 지역사 연구를 확장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이 박물관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원을 뒷받침할 때 새로운 시도가 이어질 수 있다. 이화여대 박물관은 ‘거리로 나온 뮤지엄’ 사업으로 증강현실(AR)을 활용한 야외 전시를 개최했다. 소장품을 미디어 아트로 재창작해 교내외 공간에 선보일 수 있던 이유는 대학이 기획과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장 박물관장은 “이화여대 박물관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 그 기능과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라며 “독립적인 의사결정 구조 덕에 다양한 전시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글 | 김규리 기자 evergreen@
인포그래픽 | 주수연 기자 yoyeon@
일러스트 | 박은준 전문기자
